n번방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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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지난해 3~5월 한국 사회는 텔레그램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n번방 사건에 대한 충격과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국회는 n번방 방지법을, 법원은 디지털 성폭력을 엄하게 처벌하는 양형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주범인 조주빈(대화명 ‘박사’)은 1심에서 징역 45년, 문형욱(대화명 ‘갓갓’)은 징역 34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요?
지난해 8월 발생한 한 사건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여성 청소년을 수일간 모텔에 감금하고, 성폭행 장면이 담긴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며 ‘조건 사기’를 강요한 사건입니다. 여전히 성착취와 성폭력은 가까운 곳에서, 더 복잡한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n번방 그 후’, n번방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n번방 그후①

김현서씨(가명)의 딸 민지(당시 16세·가명)가 사라진 것은 지난해 8월의 어느 날 저녁이다. 친구 연락이 왔다며 잠깐 다녀오겠다고 나간 민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카오톡 메시지에 답이 없었고,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끊어졌다.

김씨는 처음엔 그저 ‘조금 늦나 보다’ ‘사춘기라 말 못 할 고민이 있나’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민지의 학교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딸이 어디에 갔는 줄 아느냐’고 수소문했다. 민지의 휴대전화 통신기록을 뽑아 분석했다. 주변 폐쇄회로(CC)TV와 페이스북을 뒤졌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며칠을 밤낮없이 돌아다녔다. 가슴이 타들어갔다. 그러다 한 아파트 옥상에서 청소년 무리가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을 찾으려고 묻고 또 물었지만 민지 행방을 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n번방 그 후]①성폭력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조건 사냥’[플랫]

5일이 지난 때였다. 경찰이 민지를 긴급체포했다며 김씨에게 연락해왔다. 경찰은 또 다른 실종 피해자를 추적하다가 서울의 한 모텔 근처에서 A씨 무리를 체포했다. 함께 있던 민지도 붙잡혔다. 김씨는 “실종 신고를 한 딸이 갑자기 피의자로 긴급체포가 됐다 하니 황당했다”고 했다.

나중에 수사로 밝혀진 사실이지만, A씨 무리는 민지를 불러내 술에 취하게 한 뒤 모텔로 데려가 감금했다. 청테이프로 민지의 몸을 의자에 묶은 뒤 조건 사기에 가담할 것을 강요하고, 거부하자 얼굴과 몸을 때리면서 성폭행했다. 신체와 성폭행 장면을 촬영하고, 유포하겠다며 협박했다. ‘조건 사기’는 아동·청소년의 성을 사려는 남성을 상대로 폭행·협박해 돈을 빼앗는 범죄다.

20대 초반인 A씨와 10대 청소년인 B군과 C양은 기소돼 현재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공소장엔 이들이 민지가 도망가거나 신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알몸 사진 등을 찍어뒀고, 민지에게 ‘내가 잘못해서 범행에 가담하게 됐다’는 말을 하게 시킨 뒤 그 장면도 촬영했다고 쓰여 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중감금치상, 성폭력처벌법상 강간 등 상해와 카메라 등 이용촬영, 청소년보호법상 성착취물 제작이다. n번방 사건이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가담자들의 신상이 공개됐으며, 강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치솟을 때에도 여전히 성착취와 성폭력은 현실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민지는 체포된 직후 서울 동대문경찰서에서 피해 사실 조사 전에 피의자 조사부터 받았다. 또 다른 피해자에 대한 가해 행위에 가담한 것 때문이다. 피해자를 가해 행위에 가담하게 하는 방식은 성착취 범죄의 특성이다. 무리에서 이탈하려는 사람에게 보복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이용해 가해에 대한 책임을 분산시키고 죄책감 등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다.

김씨가 민지도 감금돼 있던 성폭력 피해자라고 경찰에 주장했지만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의자 조사가 5시간가량 이어졌다. 김씨는 “딸이 수일간 감금돼 두들겨 맞으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였고, 피해자라고 계속 경찰에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피의자 조사가 이어졌다”며 “피의자와 피해자 신분이 둘 다 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로서의 보호 조치가 필요했던 것 아니냐”고 했다.

경찰은 체포 당일 저녁이 돼서야 민지를 귀가 조치했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피해자로서 수사기관이 성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김씨는 그날 밤 민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자 병원을 가려고 했다. 마침 대학병원 전공의와 의사들이 파업을 했다. 이곳저곳 연락을 돌렸는데 바로 치료 가능한 병원을 찾기가 어려웠다. 김씨는 경찰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치료하고 조사하는 해바라기센터는 24시간 운영되지만, 경찰은 바로 안내하지 않았다. 김씨 딸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공범인 B군을 수사해달라고 경찰에 요청했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초동 수사가 미흡하게 진행됐다”고 했다.

검사는 공소장에 “A씨 등이 피해자(민지)를 지배하에 뒀다”고 썼다. 하지만 민지는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로 소년보호사건 송치 처분을 받았다. 김씨는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겠다고 협박당하는 상황에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A씨 등의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일부 가해에 관여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지가 A씨 등에게 붙잡혀 있을 때 도망칠 생각도 했지만 불법 촬영물이 들어있는 휴대전화를 갖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도망치지 못했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민지는 자해를 하는 등 극도의 불안 증세로 현재까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고 있다. 민지는 가출 청소년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디지털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디지털성폭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좁다. 촬영과 유포 등이 단건으로만 발생하거나, 디지털성폭력은 온라인에서만 발생한다고 인식하는 경우다. 서울 사건과 같이 실제 사건 속 디지털성폭력은 강간, 성매매와 같은 범죄들과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난다. 피해와 가해의 경계가 모호한 사건도 많다. 그 때문에 디지털성폭력은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과거 물리적 폭력이나 경제적 압박 등이 여성을 성매매에 붙잡아두는 협박 수단으로 활용됐다면, 최근 몇 년 사이 그 수단은 불법촬영물로 진화했다. n번방 사건에서도 보듯 불법촬영물은 경제적 수익 창출을 위한 도구로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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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n번방’으로 불리는 울산의 성매매 합숙소 사건은 이 같은 흐름에서 나온 극단적인 사례다. 가출 청소년·장애인 등 취약한 상태의 여성을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으로 유인해 성관계를 한 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하고 성매매에 가담하게 하는 방식으로 성매매 합숙소를 운영한 혐의로 남성 12명이 기소된 사건이다. 성매매 알선 횟수만 256번으로 집계됐다. 이런 범행 방식에 피고인들은 ‘조건 사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피의자들은 일부 피해자를 강간하거나 유사 성행위를 시키고 그 장면을 촬영했다.

울산 사건과 서울 사건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성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가 연대자D는 ‘조건 사냥’이라는 이름의 착취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과거부터 오랫동안 오프라인에서 소위 ‘포주’ 활동을 해온 40대 남성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연대자D는 “오프라인 성매매 알선을 지속해오면서 어떻게 해야 취약한 상태의 피해자를 물색하고, 이들을 이용해 성매매 산업을 하며 관리·감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알고 있는 40대 남성이 디지털 매체 활용에 능숙한 10~20대 남성들에게 그 환경에 걸맞은 형태의 ‘포주’가 되는 방식을 전수해 주는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대자D는 “서울 사건 역시 피고인들이 갑자기 고안해낸 (범행) 방식은 아니다”라며 “조건 만남이 일종의 산업 형태로 발전되고 있고, 디지털성폭력은 이제 오프라인 성착취·성폭력을 용이하게 하는 용도로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름·주소·학교·직장 등 개인정보나, 가족과 친·인척 등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을 이용해 협박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영상·사진 등이 더해지는 방식으로 변한 것”이라며 “앞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더 흐려질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범죄는 더욱 판을 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도 “디지털성착취는 온라인상에서 일어나는 유포·협박만을 말하지 않는다. (강간·성매매 등) 전통적인 성범죄와 디지털성폭력은 하나의 덩어리”라고 했다. 조 대표는 “촬영·유포·협박 범죄에서 (전통적인) 성폭력으로 이어지고, 목표는 성매매 알선과 강요가 된다”며 “돈을 벌기 위해 강제로 성을 착취하는 게 (범행의) 목적인데 이는 점차 심화되고 있다”고 했다. ‘처음 만난 여성 감금하고 성폭행·불법촬영 20대 구속’ ‘과외 광고 보고 여대생 유인해 감금·성폭행한 30대 구속’. 최근 뉴스에서 본 비슷한 사건들의 제목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21년 3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n번방’ 운영자 갓갓(본명 문형욱)의 무기징역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n번방’ 가담자의 판결에서 벌금형이 159건(50.5%)으로 가장 많았고 집행유예 131건, 실형 16건, 무죄 5건 순이었는데 이는 가해자들에게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라며 갓갓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할 것을 요구했다. 권도현기자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21년 3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n번방’ 운영자 갓갓(본명 문형욱)의 무기징역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n번방’ 가담자의 판결에서 벌금형이 159건(50.5%)으로 가장 많았고 집행유예 131건, 실형 16건, 무죄 5건 순이었는데 이는 가해자들에게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라며 갓갓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할 것을 요구했다. 권도현기자

울산 사건 피고인들에게 1심에서 최대 징역 18년을 선고한 울산지법 형사11부(재판장 박주영)는 판결에서 범행의 죄질을 나쁘게 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 사건이 전형적인 디지털성범죄는 아니지만, 디지털성범죄와 상당 부분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 짚었다. 청소년들을 성매매 현장에 묶어두려고 협박하는 과정에서 디지털성범죄와 같은 유형의 범죄로 이어질 위험성이 매우 높고, 성매매가 디지털성범죄에 기인한 파생 범죄로 발현되기도 한다는 점에서다.

지난달 5일과 지난 12일, 서울북부지법에서 형사13부(재판장 오권철) 심리로 서울 사건의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의 변호인은 비공개 재판을 요청했다. 방청석에 기자가 있을 수 있다며 “혹시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면 선량한 풍속을 해할 염려가 있다”고 했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피고인들은 매일같이 법원에 반성문을 내고 있다. 현재까지 낸 반성문이 총 50건이 넘는다. 피해자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법원을 향한 반성이다.

어머니 김씨의 말이다. “저도 제 자식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어요. 범죄자들이 이렇게 넘쳐나고 활개를 치는데… 그래놓고 왜 자식을 낳으래요, 나라가 지켜주지도 않으면서요. 내가 왜 딸을 낳았을까요. 이 아이가 커서 어떻게 출산을 하겠으며, 여자들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나요? (…) 어릴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어서 아직도 물에 못 들어가요. 그런데 그 아이는, 그 트라우마는 어떻게 할 건가요? 약을 먹어도 밤새 몸을 계속 뒤척이고, (꿈에서도) 쫓겨 다니더라고요. 학교에 갔거나 가족들이 휴가를 갔는데 가해자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꿈을 꾼대요.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런 짓을 한 놈들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면 뭐 합니까. 법이 있으면 제대로 실행돼야 하는데 누구를 위한 법인지, 가해자를 위한 인권인지. 열심히만 살면 잘 되는 줄 알았더니, 앞으로 살아가야 될 날이 많은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김씨는 A씨 등을 엄벌에 처해달라고 법원에 탄원했다.

동대문경찰서는 민지의 피해 사실 조사보다 피의자 조사를 우선한 이유에 관해 기자에게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했고, (긴급체포 후) 석방 지휘를 하기 위해서라도 가해 혐의를 우선적으로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며 “적절한 조치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를 즉각 의료기관으로 인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밤늦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며 “다음날 신속하게 해바라기센터로 인계했다”고 설명했다. 강간·협박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가해에 일부 가담한 것에 법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여러 증거를 검토한 뒤 (소년보호 처분 송치) 결정을 했다”며 “최종적으로는 법원이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han.kr
탁지영 기자 g0g0@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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