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국빈만찬장에서 확대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워싱턴|강윤중 기자
한·미 정상은 21일(현지시간) 남북한과 북·미가 기존 약속에 기초한 대화를 해나가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이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군 장병 55만명에게 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국은 글로벌 백신 공급 확대를 위한 ‘한·미 백신 글로벌 포괄적 파트너십’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 ‘약속에 기초한 남북, 북·미대화’ 원칙 확인
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 나는 남북과 북·미가 약속에 기초한 대회를 해나가는 게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나가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면서 “아울러 바이든 대통령은 남북대화와 협력에 대한 지지도 표명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남북관게 진전을 촉진해 북·미 대화와 선순환을 이루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앞으로도 한·미 양국은 긴밀히 소통하며 대화와 외교를 통한 대북접근법을 모색해 나갈 것”이라면서 “북한의 긍정적인 호응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과 정부는 그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원장이 2018년 약속한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유지할 것을 바이든 행정부에 설득해 왔다. 양국 정상이 ‘약속에 기초한 남북, 북·미 대화’ 원칙을 확인한 것은 바이든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양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우리는 또한 2018년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 등 기존의 남북 간, 북미 간 약속에 기초한 외교와 대화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라는 공동의 믿음을 재확인하였다”고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선언을 유지하고 판문점 선언에 대한 명시적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은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메시지로 풀이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북한, 그리고 북한의 핵·마사일 프로그램이 제기하는 계속되는 위협에 대한 공동의 접근법에 대해 논의했다”면서 “양국은 상황을 깊이 우려하면서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우리가 나아가는 동안 긴장을 줄이는 실용적 조치를 취하기 위한 북한과의 외교적 관여에 대한 의지를 공유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재진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목표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고 재확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북한이 강한 반대 의사를 나타내고 있는 ‘완전하게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표현 대신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이 주목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어 성 김 인도네시아주재 미국 대사를 대북외교를 책임지는 대북정책특별대표로 임명한다고 깜짝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 특별대표 임명을 환영하며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통한 외교를 할 것이며, 이미 대화의 준비가 됐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적법한 국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과 같은, 그들(북한)이 바라는 모든 것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우리 외교 안보팀이 북한 외교 안보팀을 만나서 (북핵 문제에 대한) 정확한 조건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김 위원장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확실해지기 전에는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고 못박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워싱턴|강윤중 기자
■ 한·미 미사일지침 폐지
한·미는 한국의 미사일 기술을 제한해온 한·미 미사일지침을 폐지키로 합의했다. 1979년 체결된 이 지침은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미사일 기술을 이전받는 대신 미사일 최대 사거리를 180㎞로 제한했다. 이후 한국의 기술이 발전되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커지면서 사거리 제한 등이 완화됐고, 현 정부 들어 두 차례 개정을 통해 탄두중량 제한과 고체연료 사용 제한 등을 해제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기쁜 마음으로 미사일 지침 종료 사실을 전한다”면서 ”바이든 행정부 출범 초기 한·미 방위비협정 타결과 더불어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라고 말했다. 이로써 한국은 어떤 제약 없이 미사일 등 발사체 개발에 나설 수 있게 됐다. 42년 만에 완전한 미사일 주권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우리 두 사람은 연합방위태세를 더욱 강화해 나가고 전시작전권 전환을 위한 양국의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덧붙였다.
■ 바이든 “한국군 장병 55만명에 백신 공급”
한·미 정상은 당면 현안인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백신 협력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과 함께 복무하고 있는 한국군 장병 55만명에게 완벽한 백신을 접종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한·미 동맹 차원에서 한국군 장병들에게 백신을 공급하기로 했다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최근 화이자와 모더나, 얀센 등 미국 보건당국이 긴급 사용승인을 한 코로나19 백신 2000만회 접종분을 외국에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앞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6000만회분을 미국 보건당국의 승인이 나오는 대로 외국에 공여하겠다고 밝혔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은 2차례 접종을 해야 하며, 얀센 백신은 1차례 접종만으로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생성한다. 따라서 미국이 55만명을 모두 접종하기 위해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을 제공한다면 이론상 최소 110만회 접종분을 지원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미 정상은 중장기적으로 글로벌 백신 공급을 늘리기 위한 협력 프로젝트도 밝혔다. 문 대통령은 “미국의 선진기술과 한국의 생산 역량을 결합한 한·미 백신 글로벌 포괄적 파트너십을 추구하기로 했다”면서 “양국의 협력은 전 세계에 백신 공급을 늘려 코로나19의 완전한 종식을 앞당기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감염병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한 글로벌 보건 안보 구상을 통해 다자 협력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공원에서 열린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착공식에서 추모의 벽을 제막하고 있다. 워싱턴|강윤중 기자
■ 반도체·배터리·의약품 등 첨단기술 분야 협력 강화
한·미 정상은 반도체, 자동차용 배터리, 의약품, 차세대 통신 등 첨단 기술분야 협력도 강화키로 했다. 문 대통령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의약품을 비롯한 첨단 제조 분야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면서 “한·미 양국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응하여 민관합작 6G(세대 통신), 그린 에너지 분야 협력을 강화하여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해외 원전시장 공동진출을 위한 협력도 강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미 정상은 두 정부가 모두 역점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협력도 더욱 강화키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미국과 한국이 공유된 가치 시스템을 둘러싸고 새로 등장하는 기술을 형성하기 위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양국의 기술적 장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 등 한국 기업들이 이날 오전 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미 상무부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총 44조원 규모의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을 환영하며 공동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기업인들을 일어서도록 한 뒤 특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방문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회담을 하기 전 취재진 앞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워싱턴|강윤중 기자
■ 중국 대응 문제도 논의
한·미 정상은 중국, 미얀마, 대만 등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아세안(ASEAN), 쿼드(Quad), 일본과의 삼각협력 등 지역 내 파트너들과의 더욱 강력한 협력을 통해 지역적, 글로벌 관심사 대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유지하고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보전하는 문제도 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남중국해 문제와 대만해협 문제가 거론된 것이다. 미국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되고 대만해협 문제와 관련해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이 강력하게 대응해줄 것을 바이든 대통령이 압박하지 않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다행스럽게도 그런 압박은 없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다만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인식을 함께 했다”면서 “양안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하면서 양국이 이 문제에 대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 한·미 정상 171분간 연쇄 정상회담
한·미 정상은 이날 오후 2시 5분부터 총 171분간 정상회담을 진행됐다. 두 정상은 백악관의 바이든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 야외 테라스에서 37분 간 단독회담을 진행한 다음 오벌 오피스에서 적은 수의 관계자만 배석하는 소인수 회담을 57분 간 진행했다. 이후 양 정상은 국빈만찬장에서 77분 간 확대회담을 가졌다. 각 회담 중간에 짧게 이뤄진 휴식 시간까지 포함하면 전체 시간은 187분이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랠프 퍼켓 예비역 미 육군 대령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미국 대통령이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 외국 정상이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에는 백악관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회담을 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백악관에서 나와 인근 내셔널몰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를 방문해 참배하고 한국전쟁에서 숨진 미군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기기 위한 ‘추모의 벽’ 건립 공사를 둘러봤다.
문 대통령은 미국 방문 나흘째인 22일 윌튼 그레고리 추기경 면담을 끝으로 워싱턴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애틀랜타주로 이동해 SK이노베이션이 건립 중인 자동차용 배터리 공장을 방문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