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에서 태어난 돼지는 180일이라는 짧은 기간을 산다. 인간의 식탁 위에 오르기 위해 고기로서 존재할 때 그렇다. 지구상 하나의 생명체로 자연에서 자유롭게 존재할 때는 15년에서 17년까지 살아간다.
돼지들은 언제부터 사람 곁에서 살기 시작했을까. 가장 오래된 가축 중의 하나인 돼지는 신석기 시대 인류가 수렵과 채집 생활을 벗어나 정착을 하면서 인간과 함께하기 시작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또한 호주에서는 소 또는 돼지를 기르기를 좋아한다”(又有胡州好養牛及猪)는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축이 된 것은 2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식성이 까다롭지 않은 돼지는 잔반을 처리하며 인분을 먹고 비료를 생산하며 농사가 주업이던 우리에게 중요한 자원이 됐다.
돼지가 ‘고기’로 존재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양돈업이 규모화되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공장 돼지’가 됐다. 축산과학원 전중환 박사는 “그전에는 집에서 키우는 경우가 많아 농장도 많지는 않았다. 80년대 이후 자본을 투자한 규모화된 산업으로 커졌다”고 설명했다. 1985년 농장 한 곳당 평균 11마리를 키웠던 사육두수 규모는 1800마리(2020년 기준, 통계청)로 늘었다.

경남 거창에 위치한 ‘더불어행복한농장’에서 사육되는 돼지 한 마리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최유진PD
■ 깨끗한 동물, 똑똑한 동물, 교감하는 동물
돼지는 오랜 세월 인간에게 비료와 고기를 제공한 ‘신성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늘에 바치는 ‘제물’ 혹은 ‘부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돼지꿈은 길몽으로 풀이된다. 반면 ‘돼지 멱따는 소리’, ‘돼지같이 먹는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등 게으르고, 더러운 동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공장에서 대규모로 사육되는 돼지들의 모습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면서 이 같은 인식은 깊어졌다.
하지만 돼지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돼지가 똑똑하고 깨끗하며 부지런하다고 말한다. 교육하지 않아도 잠자리와 배변 장소를 가릴 만큼 지능도 높다고 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동물 복지 농장’으로 인증받은 ‘더불어 행복한 농장’의 김문조 대표는 ‘돼지는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이라고 했다.
“돼지만큼 부지런한 동물이 없어요.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사람보다 먹는 것을 조절하는 능력도 월등해요. 다른 개체들과 경쟁해야만 먹을 수 있는 환경 때문에 그렇게(빨리 먹고 한꺼번에 많이 먹게) 된 것이죠. 경쟁하지 않는 환경을 제공하면 스스로 탈이 나지 않을 만큼만 먹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돼지
돼지는 버리는 부위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요리 재료로 쓰인다. 또 장기이식을 위한 의료용, 빵을 만들 때 쓰는 젤라틴, 화장품에 들어가는 콜라겐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돼지 박물관’의 이종영 촌장은 “돼지는 모든 것을 주고 떠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출신 디자이너 크리스티엔 메인데르츠마(Christien Meindertsma)는 저서 <PIG05049>(2010)에서 돼지 한 마리로 만든 제품 185가지를 기록했다. 돼지의 살과 지방, 뼈, 피 등에서 추출한 물질은 비누와 샴푸, 헤어컨디셔너, 치약, 치즈 케이크, 바닐라 푸딩, 맥주, 와인, 페인트 붓, 사포, 총알, 도자기, 담배, 종이, 신발, 크레용 등을 만드는데 활용되고 있다.

네덜란드 출신 디자이너 크리스티엔 메인데르츠마는 104㎏의 한 마리의 돼지, 일명 ‘PIG 05049’의 전 생애를 3년에 걸쳐 추적해 책을 썼다. 크리스티엔 메인데르츠마 웹사이트
■먹는 존재에서 더 나아가
대부분 돼지의 농장에서 태어나 삶을 마감한다. 인간이 가축으로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좁은 우리에 가두면서 본능을 잃어버린 채 짧은 시간을 살다 가지만 그 시간 동안이라도 행복을 바랄 순 없을까. 정부는 2012년부터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제’를 도입해 사육 단계에서의 동물복지를 장려하고 있지만 2013년에 인증을 시작한 양돈에서 현재까지 인증받은 곳은 17개로 전국 농장의 0.3%뿐이다. “돼지를 30년 키워왔기에 그때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수익이 줄더라도 옛날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껴요.”
김문조 대표는 “비용을 더 지불하더라도 가축의 스트레스를 줄일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동물 복지의 개념이 만들어졌다”며 “가축이 건강해야지 섭취하는 사람의 건강도 확보된다는 ‘원 헬스’(One Health)의 원리”라고 설명했다. 30년 넘게 돼지를 키웠고 동물 복지 농장을 실제로 운영하면서 이 같은 선순환을 알게 된 그는 “수익이 줄더라도 옛날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고 했다.
인간에게 사육되면서 고기로서 존재하게 된 돼지는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스튜디오 그루’는 흔히 보고, 먹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의 삶을 ‘애니캔스피크’(Animal Can Speak)를 통해 그들의 언어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