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의 시작은 언제나 ‘일상나눔’이다. “요즘 뭐해요?” “주변은 어때요?”라며 서로의 일상을 묻는다. 회의나 모임 시작 전 가볍게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질문의 답을 들으며 ‘청년’에 대한 감을 잡기도 한다. 나에게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동료 활동가밖에 없다. 게다가 대부분 30대 안팎의 직장인이다. 일상나눔이 없었다면 청년들이 정말 코인에 빠져 있는지, 알바 자리가 얼마나 찾기 어려운지도 피부로 느낄 수 없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이라는 구분은 너무 넓다. 법적으로는 19~34세를 가리키지만, 이 안에는 대학생·비대학생·취준생도, 계약직·정규직도, 비혼자·기혼자도, 임대인·임차인도, 남성·여성·성소수자도 포함된다.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개인의 집합일 뿐, 청년은 대한민국 전체 인구 중 그저 나이대가 비슷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묶어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이뿐인 ‘청년’ 구호는 와닿지 않을 때가 많다. 지난 총선 때만 해도 그랬다. 각 정당이 자랑하듯 내놓은 청년 정치인들은 어떤 정치인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슨 의제에 관심 있으며, 어떤 청년을 대변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색무취의 정치 이력 대신 그들이 거머쥐어온 화려한 타이틀만 보였다. 화려한 타이틀이 비추는 그들의 삶의 경험이 알려줬다. 기성정치가 선택한 ‘젊은 정치인’은 나와 나이만 비슷한 ‘다른’ 청년이라는 사실을.
청년의 타이틀을 달고 입법을 하는 지금의 청년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보궐선거 이후 소위 젊은 청년 정치인에게서 나온 발언을 보면 역시 갸웃하게 된다. 여성 할당제·청년 할당제 폐지, 군가산점제 부활. 나름의 정치공학적 분석을 통해 주장한 정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빠져나간 표심을 붙잡기 위한 선심성 공약일 뿐이며, 그마저도 현상적 표심 분석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그 제도가 청년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 세대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불평등이다. 불평등을 해소하기는커녕, 평등을 위해 만들어둔 제도적 장치를 없애자는 주장은 청년을 더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 몰아넣자는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인국공 사태, 조국 사태로 불거진 불공정 논란을 다시 보는 것도 같다. 어떤 청년은 ‘공정’한 룰을 외쳤지만, 누군가가 보기에 공정한 룰은 공고히 쌓아올린 불평등의 성벽 안 이야기였다. 박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는 청년도 많았다. 그나마 균일한 그룹 안에서 관계를 맺어왔다고 생각한 내 주변 청년들마저 다른 의견을 보였다. 앞다투어 청년의 박탈감을 보도했던 두 사건도 이럴진대, 과연 청년의 삶은 하나로 묶일 수 있나. 애초에 청년은 균일한 정치적 집단이었을까. 나이뿐인 ‘청년 정치’에 더는 기대가 없는 이유다. 청년 정치가 허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청년 정치인가에 주목해야 할 때다. 앞다투어 청년을 외치며 “선심 쓰겠다” 말하는 정치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눈앞의 표심을 잡기 위한 근시안적 미봉책은 그 어떤 청년의 입맛에도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다시 청년 정치란 무엇인가 묻는다. 불평등한 시대를 감각하고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젊은 정치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