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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쓸모’를 증명하라고?

지난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출간된 책의 종수는 대략 8만종이다. ‘1억 인구’의 이웃 일본도 8만종 정도이니, 꽤 큰 숫자다. 하지만 그 많은 책들 중 고개를 끄덕일 만한 국내 저자의 것을 꼽으라면 쉽지 않다. 매주 언론사에 전달되는 200~300권 중에서 국내 저자의 의미 있는 책은 참 드물게 만난다. 지난 한 해 4~5종 정도나 될까. 그나마 노작이라 할 것들은 고전 번역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판에서까지 ‘애국심’을 발휘할 것은 아니지만, 찜찜함은 남는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학계(연구)가 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서 진행이 된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많이 쓰는 게 중요하다. 그걸 연구소가 모아 단행본을 내는 식이다. 지난 20년 이렇게 해왔는데 차분하게 연구할 시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지난가을부터 만난 몇몇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걱정한 게 있었다. IMF 환란 이후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전모를 제대로 규명한 책 한 권이 없다는 앞의 경제학자의 탄식처럼 학문 현실에 대한 걱정이었다. 또 우리 사회 미래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다.

명저는 과거의 것이나, 현재를 떠올리게 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과거를 통해 당대(20세기)를 말하고, 우리는 러셀을 통해 지금을 생각한다. 실상 한 세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다음 시대를 예비하는 것이다. 정치·경제·사회의 지배적 체제를 성찰하고 타파해 미래를 기약하는 일이다. 과거가 ‘지나간 현재’였던 것처럼 미래 시점에서 현재는 ‘지나온 미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사회는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모두 안다. 의식을 포함한 인간 사회 자체의 급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음 세계를 대비해 ‘새로운 현대’의 기초를 세우는 일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 앞에선 주저하게 된다. 학문과 사회의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5·6월이면 학계는 초조해진다. 어떤 의미에서 ‘성적표’가 나오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연초 연구재단에 지원한 프로젝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문제는 성적을 매기는 기준이다. 가장 중요한 게 ‘시의성’이다. 그리고 ‘파급 효과’다. 당장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공모 단계부터 점점 쉬운 과제로 몰리고, “도전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한계”에 부딪힌다. 긴 시간과 공력을 요구하는 대작은 언감생심이다. 강가의 ‘잔돌’(논문)은 있어도, 물길을 돌릴 만한 ‘바위’(명저)는 좀체 보기 어렵다.

정부의 한 해 R&D 예산은 6조원 정도다. 대부분 과학기술 쪽임은 물론이다. 당장의 ‘쓸모’와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는 인문·사회과학 예산은 2400억원 정도 된다. 전체의 4% 남짓인 셈이다. 우리 사회가 학문을 줄 세우는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 당시 4대강 재원 압박으로 전반적 예산 구조조정을 당할 때 가장 먼저 깎인 게 인문·사회과학인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처럼 한 사회의 방향과 정신을 논하는 학문의 자리는 매우 좁다. 인문·사회과학 예산이 교육부가 아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통제를 받는 것만 봐도 얼마나 ‘쓸모’를 압박받는지 알 수 있다.

학문이 ‘쓸모’로만 이뤄진다면 진정한 발전과 인류사회에 대한 기여는 어렵다. 학문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진정한 창조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프린스턴고등연구소가 단적인 예다. 1930년대 시작 당시 백화점 재벌의 지역사회 환원이라는 어찌보면 소박한 뜻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오늘날 ‘핵과 디지털 세상’의 기초가 이곳에서 놓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부터 쿠르트 괴델, 앨런 튜링 등 이름만 들어도 ‘후덜덜한’ 천재들이 몸담았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전설을 만든 본질은 ‘자유’에 있다. 주로 수학자·논리학자·수리물리학자를 중심으로 연구소를 시작했다. 이유가 조금은 뜻밖이다. 이들 학문은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가능한 ‘예산 자유’의 학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자유’를 설계했다. 결과물에 대한 어떤 의무도 없이 자유롭게 사유하는 지성의 전당을 계획한 것이다.

“‘쓸모’라는 단어를 폐기하고, 인간 정신이 자유를 누리게 하자고 간청한다.” 연구소를 만든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의 말이다. ‘쓸모없는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순정하게 ‘방황하는 인간정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거기서 역설적으로 ‘쓸모’의 가능성이 생긴다. 인류의 진보와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렇게 탄생한 지식은 ‘공공재’라고 플렉스너는 강조한다. 왜 ‘무용함의 유용함’을 깊이 염두에 둬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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