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아남기 위해 배운 억압자의 언어…최고의 무기가 되다

장영은

리고베르타 멘추 툼

리고베르타 멘추 툼이 2015년 4월2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인권 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에콰도르 외무부

리고베르타 멘추 툼이 2015년 4월2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인권 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에콰도르 외무부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으로 태어나
여덟 살부터 커피 농장서 일하며
언어 장벽으로 인한 서러움 겪어
부잣집 하녀로 갖은 모욕 견디고
악착같이 스페인어를 익혀

“나에게는 말하고 싶은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어 읽고 쓰기를 익혀서 언젠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생각하게 되었지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반드시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누구에게 배울 작정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나는 모르니까, 네가 혼자서 할 수밖에 없을 거다.’ ”

1959년 1월, 과테말라 북서부 산악지대 엘 키체에서 마야 원주민으로 태어난 리고베르타 멘추 툼은 여덟 살 되던 해부터 커피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고향은 아름답고 고요하고 웅장했다. 마야 원주민들은 자연을 아끼고 신을 믿었지만, 누구 할 것 없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도 오빠들처럼 돈을 벌어야만 했다. 커피를 손으로 따는 일은 힘들었다. “커피나무 그늘에서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피 농장에서 일하면서 “부모님께 힘이 될 수 있는 한 사람 몫을 당당히 해내는 여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마냥 뿌듯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한눈팔지 않고” 농장에서 죽기 살기로 일을 했지만, 하루 세끼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리고베르타 멘추가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을 때, 이제 겨우 두 살이 된 남동생 니코라스가 영양실조로 죽었다. 장례 치를 돈도 없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마야 원주민들끼리는 “말이 달라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들 각자는 각기 다른 부족으로, 별도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마야 원주민이기는 하지만, 언어 장벽에 막혀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어린 동생을 잃고 난 후부터, 스페인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다들 스페인어를 못해서, 의사소통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난감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했습니다만, 도대체 누구를 불러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농장을 관리하는 감독은 리고베르타 멘추의 어머니에게 죽은 아들을 농장에 매장하고 싶다면, 한 달치 임금을 비용으로 내야 한다고 통보했다. 가족들은 하루 “일하러 가지 않고 운구를” 했고, 그날 저녁에 감독은 “오늘 하루 게으름을” 피웠다는 이유로 해고를 통보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여덟 살이었지만, “인생에 무어랄까 분노랄까 두려움 같은 것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특히 “스페인어를 할 줄 몰라서” 겪은 서러움과 모욕을 두 번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여덟 살부터 열두 살 때까지 4년 동안 커피, 목화, 사탕수수를 따며 돈을 벌었지만, 집안 사정은 늘 어려웠다. 가난도 지긋지긋했지만, 고향에서는 도저히 스페인어를 배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열세 살 되던 해에 리고베르타 멘추는 혼자서 과테말라 수도인 과테말라시티로 가겠다고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위험천만한 결정이었지만, 그녀는 완강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과테말라시티에서 돈도 벌고 스페인어도 배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도시의 부호 가문에 하녀로 들어가서 돈을 모으겠다는 그녀의 꿈은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주인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하녀들끼리 나누어 먹었다. “나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나무가 전율할 때>(1983)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나무가 전율할 때>(1983)의 한 장면.

아버지를 따라 농민운동을 시작
원주민들 설득·규합하기 위해
토착언어들을 새로 배우기도
군부의 탄압에 가족들 잃으며
1981년 멕시코로 망명 결정

어느 날 농장에서 일하던 차림 그대로 부잣집 청소를 하는 리고베르타 멘추를 ‘사모님’이 불렀다. “너에게 월급 두 달 치를 미리 주기로 했다. 그것으로 위피르(과테말라 전통 판초의 일종)와 코르테(과테말라 전통 상의에 두르는 천), 구두 한 켤레를 사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창피당하는 것은 바로 나니까 말이야. 다른 분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이 집에 오시는 분들은 모두 명사들이니 너도 몸차림을 정돈해 주었으면 해. 물건은 내가 사다 줄 테니까 너는 집에 있어도 돼. 함께 가면 내가 창피를 당할 뿐이니까. 알았지? 두 달 치 선불이야.” 리고베르타 멘추는 피눈물을 삼켰다. 악착같이 스페인어를 익혔지만, 틀릴 때가 많았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온 ‘명사들’ 앞에서 호칭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실컷 욕설을” 듣기도 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그 집에서 여덟 달을 일하고 탈출하듯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안 계셨다. 리고베르타 멘추의 아버지 비센테 멘추는 원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려는 지주들에게 저항하는 농민운동 조직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18년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1972년, 1년2개월 만에 “겨우 아버지를 구출”했지만, 과테말라를 장악한 군부는 1977년 비센테 멘추를 또다시 체포 구금했다.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국 규모의 시위가 이어지자 군부는 약 2주 후에 비센테 멘추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리고베르타 멘추의 아버지는 잠시 지하로 잠적했다가 1978년에 집으로 돌아와 더욱 적극적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다음해 역시 농민운동을 시작한 그녀 앞을 “스물두 개나 되는 과테말라의 언어”의 벽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원주민들을 설득하고 규합하기 위해서 “마므어, 카쿠치케르어, 쯔토오히르어를 새롭게 익히기 시작”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당시 스페인어도 초보 단계였기 때문에 엉망진창 같다고 느끼면서도, “우리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까지 운동의 경위와 왜 우리가 이렇게 처참한 꼴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원인을 이야기”하기 위해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방식으로 “무모하게 덤볐다”. “매사에 주저주저하는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리고베르타 멘추는 스페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지 자신에게 회의가 들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배운다는 것은 힘든 일이야. 하지만 모든 것은 그렇게 고생하며 익혀가는 것이란다.” 하지만 리고베르타 멘추에게는 그 시간마저도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1979년 농민 통일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가 군부의 회유에 넘어가 15달러를 받고 리고베르타 멘추의 남동생을 “팔아넘겼다”. 열여섯 살이었던 동생은 16일 이상 처참한 고문을 당한 뒤 죽었다. 이듬해인 1980년 1월에는 아버지가 과테말라 스페인 대사관 점거 및 화재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어머니는 투사가 되었다. “사회변화는 여성을 빼놓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승리할 수도 없다”고 외치면서 원주민들의 식량 조달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어머니는 무의미한 삶을 죽음보다 더욱 두려워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꽉 잡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죽어간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리고베르타 멘추의 어머니는 농민 운동가들 그중에서도 산속에서 게릴라로 활동하는 운동가들을 ‘자기 자식처럼’ 챙겼다. 군부는 잔인했다. 1980년 4월 어머니는 잠시 시장에 나갔다가 붙잡혔고, 그 길로 돌아오지 못했다. 리고베르타 멘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 과테말라시티의 한 수녀원에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스페인어 공부에 다시 몰입할 수 있었다.

1981년 리고베르타 멘추는 멕시코로 망명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탈출이었다. 멕시코의 사회 변혁에 앞장섰던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카사스 교구의 주교인 사무엘 루이스 가르시아는 그녀에게 머물 곳을 제공했다. 살해 위협은 계속되었지만, 침묵의 대가로 삶을 연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망명지에서도 과테말라의 현실을 고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녀의 연설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1982년 1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회의에까지 참석한다. 그곳에서 베네수엘라 출신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부르고스를 만난 리고베르타 멘추는 일주일 정도 파리에 머물면서 “약 25시간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한다. 부르고스는 리고베르타 멘추의 스페인어가 완벽하지 않지만, ‘증언’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언어야말로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그녀는 리고베르타 멘추의 ‘용기와 존엄성’을 바로 알아차렸다. “억압자의 언어를 대항 수단으로 배운” 리고베르타 멘추의 증언을 책으로 펴내기로 한다.

<나, 리고베르타 멘추>의 표지.

<나, 리고베르타 멘추>의 표지.

파리 국제회의 참석하는 등
과테말라 현실 고발 계속하다
부르고스와 함께 ‘증언록’ 출간
귀국해 원주민 운동 계속하며
1992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돼

1983년 <나, 리고베르타 멘추(I, Rigoberta Menchu: An Indian Woman in Guatemala)>가 출간되었다. “내 이름은 리고베르타 멘추, 스물세 살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을 증언하라고 하시는데요. 내 증언은 책에서 얻은 지식도, 내가 혼자서 익힌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동포와 함께 익혀왔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역정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나 쓰라린 일입니다.”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는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리고베르타 멘추가 국제적인 인물로 명성을 얻을수록 과테말라 군부는 긴장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잇달아 그녀를 초청했지만, 리고베르타 멘추는 과테말라로 돌아가고 싶었다.

1988년 4월 과테말라시티 공항에서 경찰 400여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체포되었지만, 초조해하지 않았다. 석방 후, 그녀는 원주민 운동가로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1991년 유엔의 ‘원주민 권리선언’ 준비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2년 리고베르타 멘추는 원주민 학살의 참상을 알리며 과테말라의 인권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5월에 그녀는 노벨 평화상 상금 120만달러로 아버지의 이름을 딴 ‘비센테 멘추 툼 재단’을 설립했다. 빈곤층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한편 2007년에는 원주민 정당을 조직해서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녀의 증언록 일부가 과장되었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그 사실은 역설적으로 참혹한 기억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의 어려움을 알려주었다. 리고베르타 멘추는 자신의 구술사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증언록을 출간할 때 이미 명시한 바 있다. “나는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의 비밀을 모두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숨길 작정입니다. 어떤 인류학자, 지식인이 산더미같이 책을 쌓아놓더라도 우리 비밀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리고베르타 멘추 툼의 말에는 분명 뼈가 있다. 귀를 기울여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다.

*<리고베르타 멘츄>(리고베르타 멘츄 구술, 엘리자베스 부르고스 정리, 윤연모 옮김, 장백, 1993), <라틴 아메리카 증언서사 프로젝트 -나, 리고베르타 멘추: 과테말라 인디언 여성>(이현주, 21세기영어영문학회 학술대회, 2017년 봄 학술발표회 자료집)을 읽고 큰 감동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29)살아남기 위해 배운 억압자의 언어…최고의 무기가 되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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