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한국미혼모가족협회가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를 통해 여성 14명이 모였다. 글쓰기를 위한 모임에 지원한 이들이었다. 참여 조건은 단 하나. 비혼모일 것. ‘몇은 처음부터, 누군가는 어느 날부터 각자의 이유로 비혼모가 됐다.’ 인원수만큼 비혼모가 된 이유도, 삶의 모습도 14가지로 제각각이었다. 4개월의 글쓰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육아 퇴근’ 후 밤을 새우며 완성한 글 31편을 모아 출판을 위한 펀딩을 진행했다. 책 이름은 <결혼은 모르겠고, 아무튼 아이는 있어요>다.
더한나(30대), 정나라(30대), 수페(40대)씨 등 세 사람은 프로젝트에 참가한 ‘비혼모 작가’다. 지난 18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이들과 만났다. 인터뷰에 앞서 실명을 밝힐지 여부를 두고 논의했다. 더한나씨가 말했다. “비혼모라는 단어 자체가 많은 걸 노출하잖아요. 여자, 결혼 안 함, 남편 없음, 아이 있음. 그 자체로 사생활 노출이죠. 신상을 밝히지 않아도, 저희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될 거라 믿어요.”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필명이며,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결혼을 아직 못한 상태를 나타내는 ‘미혼(未婚)’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그대로 표현하는 단어인 ‘비혼(非婚)’으로 통일했다.
작가들이 글을 통해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거창하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생각보다 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와 엄마, 둘이 사는 일상에는 기쁨과 행복, 약간의 ‘삶의 버거운 무게’가 담겨 있다.
더한나씨는 “대단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비혼모라고 밝히거나 아이를 혼자 키운다고 말하면 ‘대단하세요’ 또는 ‘용기 있어요’라고 하는 게 불편했어요. 우리가 아이를 키우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대신에 ‘멋지다’라는 말이 좋아요.”
방송인 사유리씨가 비혼 출산 사실을 밝힌 뒤 비혼 양육은 또 한 번 화두로 떠올랐다. 아이가 삶에 들어온 순간부터 작가가 되는 과정, 최근 불거진 ‘비혼 출산’ 논쟁에 대한 생각까지. ‘멋진 인생’을 향해 아이와 함께 성장 중인 세 여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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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모 된 이유와 삶은 달라도
우리는 아이와 ‘멋지게’ 살아요
아이가 내 삶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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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규칙하던 생리가 수개월 멈췄다. 당시 더한나씨의 나이 17세였다. 돈을 “겨우 모아” 병원에 가야 할 만큼 형편이 좋지 않았다. 더한나씨를 마주한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 5개월차라고 했다. “크게 당황하진 않았어요. 의사가 얼굴을 힐끗 보더니 ‘수술하려면 이 정도 금액만 가져와. 내가 해줄게’라고 했어요. 매우 싼 금액이었죠. 앞길이 창창해 보이니까 나름대로 절 생각해서 한 말이었던 것 같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더한나씨는 여동생과 짧은 통화를 했다.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다. 출산 예정일까지 배를 감싼 채 생활했다. “아이를 지켰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출산을 위해 혼자 비혼모 시설에 들어갔다. “시설 모자실에서 부모님을 만났어요. 엄마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아빠에게 이야기를 하고. 18년이 지난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에서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20년 전 공교육에서 가르치던 성교육은 신체 해부도를 보거나 마지막에 살아남은 한 마리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 여성이 임신한다는 설명을 하는 정도였다. “정자와 난자밖에 몰랐어요. 청소년기에 성에 대한 호기심은 많은데, 피임이 뭔지 배우질 못한 거예요. 그 호기심이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그렇게 18세에 엄마가 됐다. 엄마가 되는 과정은 별다를 게 없었다. 아이가 울며 보챌 땐 밉기도 했다가, 눈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을 땐 천사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다들 그렇게 엄마가 되잖아요.” 다른 점도 있었다. 부모 호적에 올라간 아이는 법적으로 더한나씨와 자매 관계였다. 더한나씨는 “제 호적에 올리기를 원했지만 딸과 손주의 미래를 생각한 어른들의 결단을 차선책으로 따랐다”라고 말했다. 축복과 격려 대신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제가 선택한 삶인데, 미성년 비혼모라는 이유로 온갖 부정적인 말들과 잘못된 인식을 감내해야 했어요. 남의 인식이 중요한게 아니라 ‘내 가족’이 중요하단 것을 깨달았어요. 아이가 돌 되기 전에 호적정정 재판을 하여 제 호적에 올렸어요.”
“감사합니다.” 임신 5주차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정나라씨가 내뱉은 말이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아이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곧장 남자친구에게 사실을 알렸다.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그 사람은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생각지도 못하게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아이의 행복을 위해 차라리 혼자 키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자친구와는 헤어졌다. 임신 사실을 안 지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지우라는 반응과 키우라는 반응이 딱 반이었어요. 오히려 정말 친하고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질타가 컸어요. 임신 사실을 알린 후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그 모습은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죠. 아이를 혼자 키우겠다고 결심한 일이 누군가의 질타를 받을 일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정나라씨는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업에 뛰어들었다. “퇴근해도 일이 끝나지 않는” 생활이 이어졌다. “내가 없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밤이면 두 시간마다 깨서 젖을 물려야 했어요. 그 시기가 지나자 화장실을 그렇게 가더라고요. 2~3시간씩 쪽잠을 자며 4년을 버텼어요.” 산후우울증의 영향도 있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던 올해 초,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했다. 여전히 퇴근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예전만큼 우울하진 않다. 정나라씨는 사회에서 ‘선배 비혼모’들을 만날 때면 딸과 나란히 선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혼자서 아이를 잘 키워내신 분들 보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버텼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어떻게 마음을 부여잡고 나아갔을까. 나는 언제쯤 아이와 활짝 웃으며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설 수 있을까.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돼요.”
“저는 좀 드문 경우이긴 해요.” 수페씨가 말했다. 그는 10여년 전 성당에서 ‘평범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생활은 남편의 잦은 가출과 연락 두절, 행방불명으로 “토막 나기 시작”했다. “아이를 갖고 싶었어요. 남편이 집에 돌아온 뒤 피임을 멈추자마자 아이가 생겼어요. 아기 돌 때까지는 남편과 같이 살았어요.” 아이가 14개월이 되자 남편은 다시 집을 나갔다. 3~4년간 연락이 끊어졌다 잠깐 나타나는 생활이 두세 차례 반복됐다. ‘다행히’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수페씨는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했다. 아이 아빠에게 큰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산 전 다니던 직장은 수페씨가 육아휴직을 한 사이에 지방으로 사옥을 이전했다. 육아를 병행해야 했던 수페씨에게 길어진 출퇴근 시간은 장벽이 됐다. 결국 사표를 냈다. 프리랜서 편집자, 공공근로 사업 노동자 등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제가 가장이잖아요.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어요.” 마흔이 넘어 공무원시험에 도전했고, 새 직업을 찾았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을 통해 양육비 이행 명령 소송을 진행한 것도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였다. 수페씨는 “양육비를 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제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기 때문에 아빠가 갑자기 나타날까 봐 불안해해요. 상실감과 그리움과 불안이 뒤섞여서 정서가 안 좋은 상태인 거죠. 저도 불안하고요. 소송의 1차 목표는 생사 확인이에요. 혹시 죽었는지라도 확인하고 싶어서 법적 절차를 밟고 있어요. 사망신고가 돼도 법적 관계가 없어 알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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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듯이 엄마가 됐고,
나를 찾고 싶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14명의 작가들, 14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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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이 세상의 전부이던 이들은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 호칭에 익숙해졌다. 화상회의는 ‘육아 퇴근’이 이뤄진 오후 10시30분 시작됐다. 글쓰기 교육은 동화작가인 김미옥 스토리메이커 대표가 맡았다.
매일 과제로 원고지 25장 분량의 수필을 써서 제출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결실이 있었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 후원은 지난 10일 게시 이후 이틀 만에 목표액 100만원의 2배를 초과했다. 모금 마감은 오는 6월15일이다.
정나라씨는 “혼자서 인터넷이나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은 있지만, 규격이 있는 전문적인 글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며 “퇴근하고, 육아를 마친 뒤 밤 10시가 넘은 시간부터 글을 써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더한나씨는 “날마다 글을 써내야 하는 일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며 “혼자였다면 쉽게 포기했을 텐데 다른 작가들과 함께하면서 약속을 잘 지켜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페씨는 “글쓰기를 하며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을 느꼈다”면서 “처음엔 단 한 줄도,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내적인 힘을 얻어가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아이와의 모든 일상이 글감이 됐다. ‘4살, 고운 마음 사전’은 정나라씨가 딸과 나눈 대화를 아이의 눈높이에서 쓴 글이다. “엄마, 그런데…아빠 구름은 어디 있어?” 하늘을 쳐다보던 38개월 딸의 입에서 이 질문이 나온 순간, 정나라씨는 “말 그대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섯 살쯤 되면 물어볼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너무 빨랐어요. 수천 번 시뮬레이션을 그렸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됐어요. 아이가 어려서 깊이 설명할 수 없고, ‘아빠 구름은 바빠서 여기 올 시간이 없대. 엄마도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라고 답했어요. 이후에도 같은 질문을 6개월 동안 하더라고요.(웃음)” 정나라씨는 글에서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난 엄마 말은 다 알지 못했지만, 엄마 마음에 쿵쾅쿵쾅 고릴라 숨소리가 나는 건 알 것 같았어.”
더한나씨는 약 10년 전 마주한 아기 엄마와의 대화를 글로 담아냈다. 대학원 석사 논문에 쓰일 설문지를 돌리기 위해 찾은 비혼모 시설에서의 만남이었다. “아기는 키우기로 선택하신 거예요?” 더한나씨는 이 질문을 ‘비혼모가 되면 꼭 듣는 그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아기를 안고 있는데, 산모가 정말 어려 보였어요. 열다섯 살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그 질문’이 불쑥 제 입에서 나왔어요. 그분이 환하게 웃으며 ‘그럼요’라고 답하는데, 뇌가 잠깐 정지된 기분이었어요. ‘아이가 너무 예쁘네요. 엄마 닮은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고 돌아섰어요.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에 남았어요.”
중학교 2학년 아들을 키우는 수페씨의 글에는 아이와 산책하며 들었던 단상, 단둘이 명절을 보낸 이야기 등이 담겼다. 수페씨는 작가 소개란에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와 함께 읽고 쓰고 이야기하면서 미처 못 큰 마음을 키우고 있다”라고 썼다. “이제는 아이가 저를 가르치는 시기가 된 거예요. 사춘기가 됐기 때문에 자기도 엄마의 삶에 간섭하고 싶어 하는 지점들이 있고요. 마냥 허튼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네 말이 맞아 엄마가 잘못했어’라고 얘기하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이런 내용을 글에 녹여내고 싶었어요. 아이의 사생활이 있기 때문에 생각만큼은 많이 못 녹였지만요.(웃음)”
‘우리는 세상의 생각보다 꽤 잘 지내고 있습니다’는 책의 캐치프레이즈 중 작가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문장이다. 이들이 마주한 ‘세상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더한나씨는 오랜만에 만난 친척에게 “유부남 만난 건 아니잖아?”라는 말을 들었다. “옛날 분들은 비혼모가 됐다고 하면 불건전한 관계를 먼저 떠올리세요. 제 친척도 속으로만 생각하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 그 질문을 꺼내신 거죠. 그동안 선입견을 품고 나를 봐왔겠구나 싶어 눈물이 났어요.” 정씨는 “결혼했냐는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이가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결혼은 했을 것이고, 아이 아빠와 함께 살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결혼했냐’ 대신 ‘아이가 누구 닮았어요?’ 같은 질문을 더 많이 받았어요.”
미디어에 비혼모·한부모가정의 모습이 불행하고 고립된 모습으로만 그려지는 문제점도 지적했다. 정나라씨는 “글을 쓰면서 비혼모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게 됐다”며 “비혼모·비혼부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고, 한부모가정에 대한 인식이 어떤가에 대한 기사보다는 시혜적인 입장에서 ‘베풀었다’는 식의 보도가 많아 놀라웠다”고 말했다. “물론 한부모가정에 대한 지원이 절실한 건 맞아요. 경제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기사가 ‘비혼모에게 후원을 해줬다’ ‘어떤 물품을 지원했다’는 내용인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작 비혼모의 삶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거든요.”
더한나씨는 비혼모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자신을 찾았던 연구원들과의 경험을 털어놨다. “무기력하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을 예상했는데, 엄마들이 너무 밝았던 거예요.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마들이 씩씩해서 놀랐다’고 말했어요. 그런 분이 한둘이 아니에요. 무기력하고 죽는소리를 해야 하는데, 다들 열심히 잘 살고 있으니까요. 방송사에서도 비혼모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밝거나 긍정적인 엄마들의 이야기는 편집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울하고 불행한 모습이 더 많이 비치니까, 사람들이 혀 차는 소리부터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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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서 내 부족함도 알게 된다
매일 함께 성장하고 있어요
이렇게 밝은 비혼모 처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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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한나씨는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잣대가 훨씬 엄격하다”고 말했다. “비혼모 인식 개선 캠페인과 관련한 기사 댓글을 보면 ‘무책임하다’는 댓글이 많아요. 근데 그들도 답을 정해주진 않아요. 욕만 신명 나게 하는 거예요. 돈도 없는데, 남편도 없고, 무책임한 결정이래요. ‘아이가 아빠를 찾으면 어떻게 할 건데?’ ‘아이 하나 키우는데 3억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꼭 나와요. 지금은 물가가 올랐으니까 5억원이 필요하대요.(웃음) 전문가들도 쉽게 하지 못할 말들인데, 비혼모가 키운 아이들은 미래가 불안하다고 답을 정해놓고 비난해요.”
수페씨는 “아이를 키우는 데 영향을 미치는 건 결혼 여부보다 주변에서 양육을 도와주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결혼해서 남편과 시부모가 있어도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까지 다 하면 힘든 거예요. 확률적으로 배우자가 없으면 혼자 육아를 할 가능성이 높긴 하죠. 그럼 ‘독박육아’가 안 되게 하면 되잖아요. 저는 ‘드림스타트(아동 통합 서비스지원)’ 사업을 통해 만난 사회복지사님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필요로 하는 도움이 100이라고 할 때, 10~20 정도는 사회나 주변에서 채워주면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겨요. 그렇지 않고 아무도 관심이 없다면 힘이 쭉 빠질 수밖에 없죠.”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앞서 감지되기도 한다. 정나라씨는 지난 4월 어린이집 가정통신문을 보고 ‘멘붕’이 왔다고 했다. “누리과정을 보면 4월이나 5월에 ‘가족’이라는 주제는 무조건 들어있어요. 가족사진을 놓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질 거라고 쓰여 있었어요. 마음의 준비는 했는데, 발표까지 한다고 하니 겁이 났어요. 담임 선생님께 연락 드려 ‘어떡하냐’고 했더니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하시는 거예요. 이미 아이들에게 여러 가족 형태에 대한 책을 읽어주셨다면서요. ‘어머니, 왜 신경 써서 굳이 연락주셨어요! 걱정 마세요’ 하는 반응이었어요. 민망했지만 감사한 마음이 더 컸어요.”
지인과의 일화도 덧붙였다. “지인의 여섯 살 된 아이가 왜 저희 아이는 엄마랑 둘이서만 사냐고 물었대요. ‘우리는 셋이 살지만, 어디는 둘, 넷 또는 다섯 명이서 살기도 해. 서로 다른 모양일 뿐 똑같은 거야. 한 명이 적다고 해서 덜 행복한 게 아냐. 똑같이 행복하고 좋은 가정이야’하고 답을 해줬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아이가 ‘응. 알았어’라고 답한 뒤 더 물어보지 않았대요.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그 얘길 들으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어요.”
과거보다 비혼모·비혼부에 대한 인식이 나아졌다는 데는 세 사람 모두 동의했다. 더한나씨는 “유튜브를 보면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엄마·아빠가 되어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처음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이들 덕에 저도 18세에 엄마가 됐다는 얘기를 조금씩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수페씨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의견이 더 많이 들려온다”고 말했다. “예전엔 ‘뭐가 자랑이라고 한부모라는 걸 말하고 다녀?’란 말을 면전에서 들은 적이 있어요. 부끄러운 일이라는 거죠. 제가 나이를 먹은 이유도 있겠지만, 비혼모라고 밝혔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비혼 출산은 최근 뜨거운 사회 이슈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에 따르면 ‘비혼모’ 키워드를 포함한 보도는 54개 매체 기준으로 2020년 8월 2건, 9월, 10월 4건에서 11월 231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11월17일 방송인 사유리가 비혼 출산 소식을 알린 것이 계기가 됐다. 비혼 출산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같은 해 12월 55건, 지난 1월 28건, 2월 30건, 3월 74건, 4월 73건, 5월(26일 기준) 22건으로 비혼모를 언급한 보도는 꾸준히 이어졌다.
결혼하지 않고,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한 ‘비혼모’ 사유리 이야기는 비혼모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사유리는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출산 준비 과정과 출산 후 일상을 공유했다. 지난 2일과 9일, 16일에는 KBS2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작가들은 “사안을 바라보는 비혼모들의 생각이 모두 같지 않으며, 사유리씨를 비혼모의 대표 혹은 홍보대사로 보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뒤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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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씨 향한 긍정 반응에 용기 얻었다
바라는 건 “우리 글도 누군가의 마음에 ‘파동’ 일으키길”
사유리가 쏘아올린 ‘비혼모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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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페씨는 우선 “굉장히 반가운 마음으로 지켜봤다”고 했다. “늘 이 이슈가 공론화되기를 바랐어요. 대학 시절, 기말고사 리포트 과제로 ‘무혼인 양육’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발표한 적이 있어요. 1995년이었는데, 할리우드 여배우가 비혼 출산을 해서 화제가 됐거든요. 당시에도 여학우들은 남편과 시댁은 필요 없지만 아이는 갖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현실에서 실현할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사유리씨가 비혼 출산을 공개한 뒤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일도 재밌었어요. ‘그래도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았어야지’ 하는 반응은 너무 낡고 익숙하게 들어서 귀에 안 들어왔고요. 긍정적인 반응들이 제 마음에 더 크게 다가왔어요.”
더한나씨는 “사유리씨가 방송에서 했던 말에 크게 공감했다”고 말했다. 사유리는 9일 방송된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아기와 엄마, 아빠가 있는 가족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선택을 못해서 아쉽다. 그래도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고, 힘든 부분·좋은 부분을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더한나씨는 “사유리씨도 엄청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아이를 낳아도 괜찮을까?’ 스스로 수만 번 물었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엄마가 되기를 선택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봤다”고 말했다. “저도 가끔 아이에게 아빠가 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해요.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려 발버둥을 친 적도 있었지만, 잘 안 됐고요. 지금은 빈자리는 빈자리로 남겨놓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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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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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자신의 글도 누군가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길 기대한다. 더한나씨가 말했다. “저희 글을 찾아보실 분들은 어쨌든 비혼모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 거잖아요.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사계절이 있듯, 우리 인생에도 겨울이 있다가 봄이 오고 있거든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삶이지만, 꽤 괜찮은 인생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정나라씨는 “비혼모의 삶은 여느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굳이 저희가 말하지 않으면 일반가정과 똑같은 삶으로 다들 보세요. 그러다 비혼모라는 걸 알게 되면 그때부터 다르게 바라보죠. 저희 글을 통해 똑같이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걸 많은 분이 아셨으면 좋겠어요.”
수페씨는 ‘작은 변화’를 소망했다. “혹시 주변에 결혼을 안 한 상태에서 임신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어쨌든 ‘축하한다’고 말해주셨으면 해요. 막상 가까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미쳤냐’고 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아이를 낳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한 번 밥이라도 같이 먹어주거나, 조금이라도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이 두 가지가 제가 바라는 거예요.”
인터뷰는 돌고 돌아 ‘나’의 성장으로 귀결됐다. “저는 10대 때도, 20대 때도 엄마였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죠. 다만 이제는 하고 싶은 거 해보면서 살고 싶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누군가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하는 그 모든 일을 해볼 거예요. 예전엔 저를 부끄러워하고 조용히 살아야 하는 존재로 여겼거든요. 글을 쓰며 인생을 돌아보는데, 정말 열심히 살았더라고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조용히 살아’라고 말하는 분도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든 잘 걷다가 넘어질 때가 있잖아요. 그의 말대로라면 계속 주저앉아 울어야 하는데, 다친 무릎과 마음 툭툭 털고 일어나 걷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했더니 실제로 상처가 아물기도 했고요. 앞으로도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삶을 살자고 다짐해요.”(더한나씨)
“아이를 키우면서 저도 내면의 성장을 하고 있어요. 제 부족함을 알게 됐고,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됐거든요. 요즘은 아이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어른인 저에 대해서 분석하고 탐구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얼마 전엔 ‘엄마 직장엔 남자 어른이 없어?’라고 묻더라고요. ‘있어. 왜?’라고 반문했더니 ‘그래야 엄마랑 눈이 맞지’라고 하는 거예요.(웃음) ‘엄마가 눈이 맞았으면 좋겠어?’ 하니까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래요. 어떻게 하면 엄마를 기쁘게 할까, 웃게 할까를 이 아이는 늘 생각하는구나. 아이가 자라는 만큼 제가 자라는 기분이에요.”(수페씨)
정나라씨는 다른 작가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전 이 프로젝트가 되게 거창했어요. 같은 일상을 반복하면서 ‘일하고 아이 키우는 사람’ 이외에 제 모습을 잊어버렸거든요. 다른 엄마들과 서로 삶을 나누면서, 글을 쓰면서 새로운 삶을 발견한 기분이에요. 새로운 도전거리라고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제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어요. 또 함께해준 엄마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우리 참 멋지다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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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기자 yjleee@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