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영화 <노매드랜드>를 봤다. 광활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압도적이었고, 노마드들의 산뜻한 우정이 좋은 기운을 전해줬다. 그 또한 삶의 선택지 중 하나이며, 각자 자기 기질에 맞는 선택을 하여 끝내 삶을 사랑하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다만 그게 ‘미국 백인 중산층’ 출신이 아니어도 가능한 삶일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노마드 캠프에 흑인은 없다. 일자리 구하기가 흑인에게 더 난도 높다는 사실과, 노마드로 미 대륙을 누비다 경찰의 과잉 대응을 마주할 확률이 높다는 배경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 노인에게는 아마존의 ‘캠퍼포스(Camper Force)’ 같은 일자리마저 드물다.
그래도 노마드적 삶의 태도는 가질 수 있다. 영화 속 노마드는 삶의 끝을 인식하며 산다. 끝없는 부의 증식을 바라지 않으며(혹은 포기하며), 미래에 저당 잡혀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하지 않고, 죽기 전 더 많은 아름다움을 눈에 담기 위해 아직 보지 못한 세상으로 달려간다. 내 친구들이 떠올랐다.
친구 A는 실업 상태에 놓인 적이 거의 없다. 휴직 기간을 오래 가질 수 없어 적당히 타협하며 일자리를 전전했다. 버는 돈의 대부분이 현재를 위해 쓰이기에 미래를 위한 자본을 축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1인분의 책임만 안고 살고 싶지만 ‘홀어머니 모시는 아들’에 대한 기대를 벗어던지기 쉽지 않다. 믿는 건 로또이며, 끝내 당첨되지 않는다면 60세쯤 스스로 삶을 끝낼 계획이다. 사양 산업에 몸담았다고 자각하는 잡지 에디터 B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박봉으로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고 느껴 자주 불안과 무기력에 빠진다. 프리랜서 C의 사정이 가장 낫다. 알뜰살뜰 자산을 형성해 집을 샀다! 차근차근 단계 밟아 삶을 개선하려고 빌라를 매입했다가 우울증에 걸려서 문제지…. 그때는 ‘무리하면’ 같은 동네 아파트를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리 무리해도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격차는 날로 벌어진다.
이들은 취미생활로 일상을 가꿀 줄 알고, 다정함과 선량함을 잃지 않으며 주변 사람을 웃게 만든다. 이런 이들의 노년이 불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빈곤노인이 될 확률은 굉장히 높고, 사회적 시선은 냉혹하다. “그러니까 재테크를 잘했어야지” “재테크도 능력” 같은 말과 생각들. 승자독식을 지지하는 목소리와 약자혐오 사고방식들.
정치가 이익과 위험을 나누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약함을 혐오하는 사회 분위기가 개선되길 바란다. 아니면 적극적 안락사와 조력자살이라도 허용하든지.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등 선진국과 미국 일부 주에서는 이미 조력자살이 합법화됐다. 이 중 스위스는 돈 내면 외국인도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상담을 거친 뒤 신경안정제를 제공받아 마시면 수 분 내로 잠이 들고 고통 없는 죽음에 이른다고. 필요한 예산은 약 2000만원. 친구들은 2000만원 모아 스위스로 가는 게 꿈이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진담일 것이다. ‘내 집 장만’보다 가능한 미래니까. 국부유출 막아보자. 기한을 정해두고, 그때까지 힘껏 삶을 사랑하며 분투하는 이들을 존중하여 결단의 순간 고통을 덜어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