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앞에 겹겹이 놓인 ‘사다리’
최대 변수는 부모 경제력·지위
‘노력×재능+거주지역×부모의 경제력+열정+경험=능력’(황산하씨·24)
‘부모의 경제력×부모의 사회적 지위+능력×(학벌+취업)²=성공’(이동원씨·20)
경향신문과 한국교육방송공사(EBS)가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기획을 위해 만난 20대 대학생 21명 중 다수는 직접 만든 ‘능력·성공 공식’에 부모의 경제력을 주요하게 배치했다.
‘부모’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경제력’ ‘인맥’ ‘자라온 환경’ 등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적는 경우가 많았다. 강소영씨(23)는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경제력과 지위가 뒷받침된다면 노력하기도 성공하기도 쉽다고 생각한다”며 “부모의 경제력과 지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노력이라는 요소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유진씨(24·충남대)는 “한국에서는 부모님의 사회적 지위가 큰 부분이라고 느낀다”며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은 경험을 터득한 인생 선배와 혈연관계라는 건 타고난 환경”이라고 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이씨는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인터뷰에 응한 대학생 다수는 대학을 인생의 출발선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평등한 출발선은 아니라는 인식이 강했다. 대학입시를 치르면서 지역과 경제적 차이에 따른 교육불평등을 경험한 이들은 ‘청춘’이라는 단어에서 ‘젊은 낡은이들’ ‘포기에 익숙해지는 나이’ ‘연습생’ ‘불확실한 미래’ ‘희망고문’ ‘고등학교에 이어 또 노력을 해야 하는 사람’ 등을 떠올렸다.
송경원 정의당 교육 분야 정책위원은 “경쟁이 심해지면 가지고 있는 밑천을 총동원하기 마련”이라며 “밑천의 차이에 따라 기회나 과정, 결과가 불균등하다”고 말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
대학생 장나현씨(23·계명대)는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데 대략 2시간30분 걸린다. 경북 상주에 사는 장씨가 대구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논밭이 펼쳐지는 시골길을 지나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한참 기다렸다 탄 뒤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야 한다. 거기서 또 1시간30분가량 버스를 타고 대구시내에 도착해 전철을 갈아타야 학교에 갈 수 있다. 광고기획 공모전을 함께 준비 중인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도 그는 왕복 5시간을 꼬박 투자한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다반사다. 장씨는 “별로 한 것도 없이 지친다”고 했다.
대구는 광역시이다. 하지만 장씨는 대구도 교육 인프라가 한정돼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각종 공모전과 서포터스 활동, 봉사활동, 프로젝트 등 입사지원서에 스펙으로 넣을 만한 대외활동은 대부분 서울 등 수도권에서 열린다. 장씨가 대외활동을 하려면 학교 수업을 빼먹고 교통비와 숙박비를 오롯이 감당하며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영상편집과 일러스트도 배우고 싶지만 대구에는 관련 학원이 몇 개 없다. 집안 형편이 여유로웠다면 진작에 서울에서 생활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마케팅 쪽으로 취업을 원하지만 직무경험은 거의 없다.
“하나둘씩 포기하다 보면 스펙에서 밀리게 되는 거죠. 사람이 많은 서울에 혜택이나 정책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는데, (지방에 사는 게) 저희 잘못은 아니잖아요. 빨리 탈출하고 싶어요.”
상황이 답답하기는 같은 동아리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펼칠 기회를 놓치는 것만 같다. 이모씨는 “서울에 있는 기업에 인턴 지원을 많이 해봤는데 매번 떨어졌다”며 “탈락 이유야 모르지만 회사들이 서울에 있는 학생을 뽑지 굳이 지방에 있는 학생을 뽑을까 싶다”고 했다. 김모씨도 “선배들도 ‘기회가 되면 편입하는 게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고 하더라”고 했다.
■ “편입 준비, 대학 네임밸류만 따져”
강원 지역 대학에 다니던 송예슬씨(23·단국대)에게 편입은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돌파구였다. 주로 서울에서만 열리는 북콘서트 같은 문화예술행사가 송씨에게는 매번 눈앞에서 놓치는 기회 같았다. 그는 결국 지난해 편입했다. ‘인서울’에 성공하자마자 대학생 연합 봉사동아리에 들어갔고, 3개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자원봉사단에도 참여하고 있다. 편입을 준비하면서 대학 서열을 열심히 따졌지만 당초 목표한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당장 여름방학에 하려고 신청한 현장실습 목록에는 이름을 들어본 기업이 많지 않다. 최근에는 국제학교에 다녀 영어를 잘하던 친구와 집안이 풍족해 4수까지 한 친구가 상위권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위권 학교에 오전 9시쯤 가본 적이 있어요. 도서관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캠퍼스에는 ‘○○고시 합격’ 같은 플래카드가 많더라고요. 이렇게 열심히 일상을 꾸려야지 좋은 곳, 대기업에도 갈 수 있구나 했죠. 학벌이 이렇게 내 삶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현재 휴학 중인 홍준선씨(22·배재대)도 편입을 고민하고 있다. 홍씨가 재학 중인 학교는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신입생 충원 미달로 최근 학과를 잇따라 통폐합했다. 정치언론안보학과로 입학한 그는 1학년 1학기가 지나기도 전에 학과 통폐합으로 공공인재학부 소속이 됐다.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올해에는 행정학과와 다시 통폐합됐다. 정치학을 배우고 싶어서 들어온 대학이지만 행정학과로 강제 전과된 셈이다.
지방대생의 한계도 여실히 느낀다. 홍씨는 최근 방위산업체 복무를 위해 봤던 한 중견기업의 면접을 잊지 못한다. ‘군복무 기간이 끝나고도 계속 일할 수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면접관은 “저희, 그래도 나름 대학 봅니다”라고 답했다. “주변에서 어느 대학에 다니냐고 물어봐서 답하면 안 좋은 시선을 느껴요.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라는 놀림도 받고. 노력하려고 해도 위축이 되죠. 스무 살에 내 인생을 모두 평가받은 느낌이에요.” 홍씨의 말이다.
■ “스펙 만드는 시장서도 학벌 차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면 학벌에서 좀 자유로울까.
“학교 취업특강에서 4학년 선배가 ‘마케팅팀에 가고 싶다’면서 자기 스펙을 열거하더라고요. ‘스펙이 엄청나구나’ 했는데, 대기업 전 인사팀 관계자가 ‘포기하세요. 안 됩니다’라는 거예요. 단호하게. 그러면서 ‘여기보다 높은 학교 친구들도 갈 자리가 없다’, ‘티오(모집인원) 많은 영업직으로 가서 부서 이동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마케팅 직무에 관심이 있던 강소영씨(23·경희대)는 그날 이후 진로를 바꿨다. 그는 “취업시장에서 이 정도 학벌이면 마이너스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취업특강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조리를 전공한 강씨에게 대학은 ‘신분상승’을 뜻하는 곳이었다.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특성화고에 진학했고, 학력의 영향을 덜 받는 길을 찾아 해외취업을 나갔다. 하지만 해외에서도 영주권을 받을 때 대졸 학력이 있으면 가산점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귀국해 뒤늦게 대입을 준비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대학은 ‘원점’을 의미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에 왔는데 이때까지 노력했던 것과는 또 다른 것들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업시장에선 학벌, 학점, 토익점수, 어학연수, 자격증, 봉사활동, 인턴, 수상경력은 물론 성형까지 포함한 취업 9종 세트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강씨는 학교 근처 샌드위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교내 근로도 한다. 부모님 도움 없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강씨는 지난해에는 치킨집 서빙도 함께했다. 과외와 학원 강의 등도 알아봤지만 그에겐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최근엔 모 식품기업의 서포터스 면접에서 떨어졌다.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시장에도 학벌이 작용한다고 강씨는 생각한다. “취직하기 위해 쌓아야 하는 스펙을 만드는 시장에서도 학벌 차이가 존재하고,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없는 친구들은 어떻게 취업시장에 나갈 수 있나,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오더라고요.”
■ 상위권 대학 재학증명서는 ‘프리패스’
김수인씨(23·숙명여대)도 생존과 경쟁 사이에서 매일 바쁘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비대면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학원 두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한 곳에서는 채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아이들을 직접 가르친다.
대외활동도 열심이다. 대학생 박람회를 기획하는 활동과 카드뉴스 및 유튜브 콘텐츠 제작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틈틈이 인턴 모집 공고를 확인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머리가 멍해질 때가 있어요.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살지 않으면 마음이 더 불안하고 불편해요.”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줄이면 되지 않겠냐고 할지 모른다. 그는 “취업시장에서 매력적인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정량적인 스펙이 많이 필요하다”며 “자격증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 비용 등을 충당하려면 아르바이트 2개는 필수”라고 했다. 김씨는 현재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것도, 가장 필요한 것도 ‘경제적 여유’를 꼽는다.
가끔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할 수 있는 게 조금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는 한 방송사 인사팀에 지원했다 떨어졌다. 언론사 인턴과 리서치 인턴 등에도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서울의 한 중위권 대학에 다니던 손평아씨(20·서울대)도 얼마 전까지는 능력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생활이 달라진 것은 반수로 서울대에 합격하면서다.
“초·중등 학원에서 청소하고 채점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서울대에 합격하니까 원장님이 ‘영어 수업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하더라고요.”
서울대생이 된 후에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시급도 많아졌다. 동문 인맥 덕분에 인턴 고민도 덜었다. 대학생 커뮤니티의 학교별 취업 게시판을 봐도, 예전 학교의 게시판에는 생소한 회사 이름들이 있었지만 서울대 게시판에는 이름이 알려진 기업들의 공고가 올라온다.
“재학증명서가 프리패스 같아요. 그런데 저 자체는 변한 게 없고 제 실력은 여전히 똑같은데 ….” 손씨는 세상의 달라진 대우가 씁쓸하다.
■ 법률 동아리 활동도 가정형편 따라
대학 문턱을 넘기 위해 오랜 시간 달려온 청년들은 대학에 들어와서 또 다른 사다리 오르기에 매달린다. 간신히 한 칸 올라왔는데, 숨 쉴 틈이 없다. 다음에 올라야 하는 칸은 더 높고,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진학도 그렇다.
“여러 가지 스펙을 쌓아야 하는 수시(전형) 성격이 강한 취업준비보다 로스쿨은 법학적성시험(LEET) 성적과 학점, 토익점수를 보니까 온전히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요.”
박재민씨(23·서강대)는 기존에 나온 문제집 위주로 변호사시험 기출문제를 풀고 있다. 사설업체의 인터넷 강의도 있지만 강의당 수업료가 50만~60만원이나 한다. “한 달 월세보다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하니까 할 수가 없죠.”
실전감각을 익히기 위한 LEET 사설 모의고사도 연간 몇 차례 열리지만 1회 응시료가 10만원가량 한다. 기초수급대상자인 박씨는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로스쿨 진학에 필요한 정성적 요건을 채우려면 법률 동아리 활동이 필수이지만, 이마저도 최소화하고 있다.
법률 동아리 활동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것은 윤태양씨(22·한양대)도 마찬가지다. 윤씨는 “장학금 활동에만 치중하다 보면 스펙을 쌓기 어렵다. 시간이 없다. 스펙이 달린다”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이런 걱정 안 하고 좋아하는 법 동아리에 들어가고 학회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기숙사 방 책상 앞에는 ‘물고 늘어지자 포기 X’ 등이 적힌 노란색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반면 성규륜씨(21·서울대)는 로스쿨 진학을 위해 대외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법무부가 주최하는 법령경연 학술대회에 나갔고, 이번 여름방학 때는 국제법 모의재판 대회에 나갈 계획이다. 매주 한 차례 국제법 학회에서 관심있는 법령을 찾아 평석을 달고, 모의재판을 준비하기도 한다. 로스쿨 진학을 위해 복수전공도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도 없다. 그도 학비가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다.
“친구한테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법조계로 가고 싶다면 그것조차 투자로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길 들으니 나에 대한 투자로 마음먹게 되더라고요. 그만큼 열심히 해야겠죠.”
①15세, 수학을 말하다
②20대, 사다리를 말하다
③헌법 제31조를 다시 말하다
■공동취재팀
경향신문 : 정제혁 정책사회부장, 이성희·김서영 기자
EBS : 오정호 방송제작기획부장, 이상익·김현수·윤미영·정보영·김나연·박송희 PD, 김유미·윤선영·황도현·조희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