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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보다 평등이 필요하다

입력 2021.06.26 03:00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의 취임을 계기로, 이른바 ‘공정’에 대한 논쟁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사회가 워낙 팍팍하다 보니 이 논쟁도 아주 격한 목소리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반론을 제기하는 측은 현실의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사람마다 제각각 ‘출발점’이 다르고 그래서 달리기 시합의 규칙만 엄정하게 지킨다고 공정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출발점’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달리기 트랙도 땅을 고르게 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공정이 중요한 가치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공정의 문제와 (불)평등의 문제는 다른 것이며, 지금 전 세계적으로 화급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는 사실이 쉽게 망각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잠깐 이 ‘산업사회에서의 (불)평등’의 문제를 가장 오랫동안 집요하게 해결하려 했던 민주적 사회주의 사상사의 곡절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전통적으로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은 평등 문제에 대해 두 가지의 기본적인 접근을 내용으로 삼아왔다. 첫째, 아무리 가난한 이라고 해도 누릴 수 있도록 사회가 제공하는 의식주 및 기본적 생활 수준의 최소한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릴 것. 둘째, 특출한 능력이 없다고 해도 열심히 일하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얻을 소득의 가치가 인간의 존엄과 만족스러운 인생 계획을 이룰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영국의 신노동당을 필두로 이른바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가 출현하면서 이러한 전통에 중대한 수정이 이루어진다. 지구화와 시장 신자유주의가 발호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신노동당은 위의 ‘평등’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기회의 균등’으로 재해석하는 파격을 이루었다. 즉 사람마다 능력과 기여가 다르게 되어 있고 이에 대한 평가와 보상은 시장 경제의 메커니즘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민주적 사회주의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켜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빈부와 사회적 위치에 무관하게 모두에게 고르게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요컨대 공정한 ‘출발점’과 고른 ‘트랙’을 폭넓게 제공하는 ‘공정’이 새로운 ‘평등’의 개념이라는 과감한 해석이었다.

90년대 이후 이렇게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이라는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가져온 성취를 폄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적어도 상위 20%의 직군과 직종에서 여성, 소수자, 빈곤층, 인종 등의 다양성은 크게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30년의 결과가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20 대 80의 분리라는 ‘불평등’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달리기 시합은 더더욱 아니다. 힘껏 달려볼 의사와 능력이 있는 20~30퍼센트의 사람들에게는 ‘공정’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산업사회라는 현상을 최초로 발견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창시했던 19세기 초 앙리 생시몽의 말대로, “가장 숫자가 많고 가장 불리한 위치에 처한” 사람들은 아예 그 달리기 시합장에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들 다수가 꿈꾸는 삶은 그렇게 극적인 드라마나 시합과 같은 것이 아니다. 특출한 능력이나 의지를 타고 나서 꿈을 불태우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빈둥거리지 않고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 이웃들과 조촐하게 삶을 즐기고, 태어난 한 인생 그럭저럭 큰 탈 없이 무사히 살다가는 것 정도인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크게 내세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묵묵히 일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소중한 이유는, 산업사회가 실제로 작동하게 되는 주된 동력이 바로 이 절반이 넘는 보통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살벌한 달리기 시합 경기장 바깥에 있는 이들의 소박한 삶과 꿈을 지켜내는 것이 바로 본래의 민주적 사회주의 전통에서 지키려 했던 ‘평등’의 가치였던 것이다.

부동산과 코인 등 자산가격의 등귀에, 갈수록 좁아드는 ‘좋은 일자리’와 중산층 진입의 기회에, 많은 이들의 현행 자본주의라는 게임의 규칙이 ‘공정’한가에 핏발을 세우며 논쟁을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것으로 지금 뜨거운 감자처럼 우리에게 떨어져 있는 ‘(불)평등’의 문제를 갈음하진 말아야 한다. 아무리 출발점이 고르고 아무리 트랙이 고른 경기장이 마련된다고 해도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그 경기장 바깥에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상태는 갈수록 끔찍해지고 있다. 쥐꼬리만 한 그나마 불안정한 수입에 인생 계획 자체를 놓아버리는 젊은이들, 일터로 갔다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노동자들, 반 등수가 절반 아래인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정’이 아니라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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