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 미치는 심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대표적 학자는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다.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한 그가 쓴 <내러티브 경제학>은 경제를 움직이는 입소문의 힘을 분석한 저서다. 이 책은 미국에서 1929년 주식시장이 최고점에 이르기 직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녁 자리에서 누군가 갑자기 큰 부자가 됐다는 환상적인 얘기를 들었다. 무수한 이들이 투기에 빠져 어떤 회사인지도 모르고 전 재산을 쏟아부었고, 실제로 큰돈을 벌었다. 누군가 지어낸 것처럼 들리지만 이런 이야기도 자주 듣다보면 무시하기 어렵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부동산과 증시, 가상통화 등 현재 한국의 자산시장이 그가 묘사한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렇게 전했다. “한 직원이 예전에 가상통화 ‘오로라’에 투자했다고 하면서 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이름이 예쁘다는 거였어요.”
한국 자산시장이 버블(거품)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동산 가격은 정부 관료들의 경고에도 줄기차게 오르고 증시도 이상 활황세에 접어든 지 오래다. 가계부채 중 상당액은 자산시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빚을 내 주식에 투자하는 빚투 규모는 24조원에 육박하면서 올 초와 비교해 4조5000억원 가까이 증가했다.
버블은 흔히 자산가격이 투기에 의해 내재가치보다 과대평가된 것을 말한다. 버블에 올라타는 것도 투자의 한 방법이란 인식이 확산되면 버블은 더욱 팽창한다. 자신이 산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주식, 가상통화, 아파트를 사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는 한 버블은 꺼지지 않는다. 투자자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해 버블을 확대 재생산시키려는 시도도 끊임없이 이뤄진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지출 확대와 초저금리 정책 등이 자산시장 버블의 주요 원인이긴 하나 정부의 무능, 표만 바라보는 정치권이 버블을 키웠다는 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정책의 오류가 버블의 심각성을 축소시키고 되레 키운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부동산시장을 보면 정부는 집으로 돈을 벌 수 없도록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불로소득 척결을 외치면서도 정작 불로소득을 챙기려는 고위 공직자들의 행태가 확인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최근에도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이 투기 의혹으로 낙마했다.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고위 공직자들이 만든 부동산 대책을 시민들이 신뢰하긴 어렵다. 세제, 금융, 공급을 망라한 온갖 대책을 20차례 넘게 내놨지만 버블은 더욱 커진 것이 현실 아닌가. 기획재정부가 주식 양도세 부과 대주주 기준을 10억원에서 3억원으로 강화하려다 여당의 입김에 못 이겨 접은 것도 과세원칙이 정치적 계산에 따라 흔들린 사례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가상통화 투자 열풍을 두고 ‘비이성적 과열’이라고 우려한 게 2017년 송년 기자간담회에서다. 금융산업적 측면에서 가상통화 자체를 백안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건전한 투자행태가 이뤄지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정부가 해야 한다. “부동산도 부동산이지만 어쩌면 가상통화를 둘러싼 정부의 무능이 문재인 정부 최대 경제실책이 될 것”이란 금융권 최고경영자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린다.
자산시장에 버블이 생기지 않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해도 최대한 덜 생기도록 하고, 연착륙시켜야 할 책임은 정부와 정치권, 양식 있는 경제전문가들에게 있다. 현재 자산시장 버블을 우려해 거품을 빼려는 움직임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시그널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버블은 급작스레 제거해도 위험하지만 이리저리 눈치보다 실기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한은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자산가격이 금융불균형을 키우고 있다는 경고음을 발신하고 있는데 정부가 엇박자를 내면 시장의 혼란은 커진다. 한은 외에 경제 정책에 결정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시장 참여자들에게 건전한 투자를 유도할 수 있도록 ‘악역’을 자처해야 한다.
미래의 국가경제를 생각하는 ‘버블 파이터’가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정치권은 표만 의식해 여론 눈치를 보면서 경제구조가 왜곡되는 걸 방치해선 안 된다. 투자자들 역시 근거 없는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하면서 리스크 관리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빚을 내 특정 자산에 ‘몰빵’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잔치가 끝날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