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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함과 모호함 사이를 걷다

입력 2021.07.03 03:00

여백 없는 확신으로 가득찰 때
우리의 삶은 천박해진다
극단주의자들에게 장악되면
종교는 더 이상 통합 기제 아냐
광신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

오늘은 기독교 전통에서 성 토마스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그는 ‘의심하는 토마스’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사람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다른 장소에 있었다. 나중에 동료들을 통해 예수 부활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그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스승의 옆구리에 난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실증주의적 태도이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의심하는 사람’이라는 찌지를 붙여 구별했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흔들림 없는 확신을 믿음의 표지로 생각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불편함을 느낀다. 회의는 과연 진리의 적인가? 회의의 용광로를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확실성에 이를 수 없다. 그렇게 얻어진 확실성조차 신념이나 태도를 경정하는 데 도움이 될 뿐 객관적 사실이 아닐 때가 많다. 데카르트는 사유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 여겼지만, 사유의 결과물도 현실을 온전히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범주나 언어도 현실의 근사치를 반영할 뿐이다. 삶은 모호하고, 인간은 늘 흔들림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그러한 흔들림이 일으키는 어지럼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확실한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종교 체험은 거꾸로 우리가 확고하다고 여겼던 삶의 토대를 사정 없이 흔든다. 질서 잡힌 세상이 혼란스럽게 변하고, 안다 여겼던 것들이 낯선 것이 되고 만다. 느닷없이 닥쳐온 그런 체험 앞에서 인간은 경외심에 사로잡히거나 근원적 불안감을 느낀다.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불안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일수록 확실한 것에 집착한다. 그들은 일쑤 권위 있는 누군가에게 자기 마음을 비끄러매려 한다. 사유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추종자가 되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추종하는 사람일수록 맹목적 확신에 사로잡힌다. 이 무심한 확신은 다른 생각이 파고들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배타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종교적 독단과 독선은 위험하다. 다름을 용납할 수 없기에 매우 폭력적이다. 그것은 어느 종교나 다 마찬가지이다. 교조주의에 빠진 이들은 진리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진리는 모름에 대한 자각과 의심을 통과할 때만 당도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수도사였던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네가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고 말했다. 부정의 길이다. 참된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긍정의 길도 필요하지만, 부정의 길도 외면하면 안 된다. 비어 있음이야말로 사물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배경이 될 때가 많지 않던가. 진실의 문은 우리가 회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열릴 때가 많다.

인생의 길은 확실함과 모호함 사이로 나 있다. 모호함을 외면하거나, 여백 없는 확신으로 그것을 덮어씌우려 할 때 삶은 천박해진다. 자기 확신에 찬 극단주의자들에게 장악될 때 종교는 더 이상 사회 통합의 기제로 작용하지 못한다. 편협한 신앙 혹은 광신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하다. ‘의심하는 토마스’라는 오명을 썼던 토마스가 복권되어야 한다. 그는 합리적 의심을 통해 보다 확실한 진리 인식에 이르렀다. 의심 혹은 회의는 진리의 적이 아니라, 더 깊은 확실성으로 우리를 이끄는 안내인이다.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우리가 먹구름을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산 것이 아닌지 묻고는, 우리 마음속 구름을 닦자고, 우리 머리를 덮은 쇠항아리를 찢자고 말한다. 그래야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인생의 정답은 없다. 확실함과 모호함 사이로 난 길을 애써 걸으며 작은 빛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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