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대선 도전 준비 ‘현역 복서’
가난 벗어나려 시작한 복서
정계 진출 후 여당 대표까지
정부 부패에 반기 들어 축출
지금은 그의 재선 막는 복병
“파키아오가 훈련에 집중할 수 있게 공격을 멈춰라. 그는 필리핀에 자부심과 명예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지난 19일 필리핀 하원 부의장 루퍼스 로드리게스가 한 발언은 에마누엘 다피드란 파키아오(43)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매니 파키아오로 불리는 그는 복싱 역사상 최초로 8체급 세계챔피언을 달성한 복싱 영웅이자 현역 필리핀 상원의원이다. 지난 17일까지는 집권 여당 ‘PDP라반’의 대표였다.
아직도 현역 복서로 뛰는 파키아오는 오는 8월21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1990년생 복서 에롤 스펜서 주니어와 대결한다. 이 경기는 결과보다 경기 후 파키아오의 인터뷰 때문에 더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2022년 5월 치러지는 필리핀 대선 도전을 선언해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앞날을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정치인들은 더 높은 자리를 꿈꾼다.” 파키아오가 이달 초 AFP통신 인터뷰에서 한 말은 그의 전 생애에 적용된다. 필리핀 민다나오섬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복싱을 시작했다. 더 넓은 무대를 찾아 민다나오섬에서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과 태국, 미국으로 차례차례 건너갔다. 한 체급을 평정하면 체급을 올려 다시 챔피언이 됐다. 정치 인생도 그랬다. 그는 2007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자 2010년 아내의 고향 사랑가니주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됐다. 2013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가난을 겪어본 파키아오는 ‘보통 사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필리핀 정치인들이 흔히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지주 가문 출신인 것과 달리 지방 중견가문 출신인 두테르테 역시 정계에서는 비주류였다. 그래서인지 파키아오가 2016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자 두테르테는 “우리는 둘 다 민다나오 출신”이라며 라이벌 진영에 속한 그를 적극 응원했다. 파키아오도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사형제 부활 법안을 발의했다. 동성애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비난했다. 파키아오의 이런 행태를 두고 스포츠 저널리스트 카림 지단은 “파키아오는 권력을 좇으면서 살인을 승인한 대통령의 선전 도구가 돼버렸다”고 비판했다.
서로의 권력을 키워주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올해 초부터 벌어졌다. 미국 대신 중국의 도움으로 경제개발을 하려는 두테르테가 남중국해 분쟁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취한 것이 계기였다. 파키아오는 “중국에도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며 반기를 들었고 지난달부터는 두테르테 정부의 부패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다. 차기 대선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두테르테와 거리 두기를 시작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두테르테는 “복싱 챔피언이라고 정치도 챔피언일 것이라 착각하지 말라”며 거친 말을 쏟아냈다. 결국 파키아오는 여당 대표에서 축출됐다.
두테르테는 퇴임 후를 생각하면 초조한 상황이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달 두테르테에 대한 수사 허가를 신청했다. ICC 검사실은 마약과의 전쟁으로 1만2000~3만명이 사망했으며 군이나 경찰의 청부살인도 상당한 걸로 추정한다.
집권여당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다음 대선에서 부통령에 출마할 것을 의결했다. 필리핀 대통령은 6년 단임제로 연임이 불가능하며,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각 선출한다. 대통령 후보로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장녀이자 다바오 시장인 사라 두테르테가 거론된다.
파키아오의 출마가 딸을 앞세운 두테르테의 사실상의 재선 시도에 복병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야권 성향 매체들은 파키아오의 출마가 사라 두테르테의 표를 갉아먹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언론인 출신 정치분석가 조이 살가도는 필리핀 매체 래플러에서 “두테르테가 권력을 잡겠다는 목표에 파키아오가 재를 뿌릴 것”이라고 말했다. 컨설턴트 조슈아 마날로는 국제정치학학생협회 블로그에 “파키아오의 도전은 필리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자 대 가난뱅이의 대결”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