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벙첨벙! 바라만 보아도 시원한 소리가 들릴 듯한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이 떠오르는 날씨다. 하와이안블루 빛이 도는 수영장이 딸린 리조트를 예약할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자는 책 한 권을 손에 들었다.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을 떠올리게 할 만한 거대한 고래를 잡으러 떠나는 허먼 멜빌의 항해일지 <모비딕(Moby Dick)>이다.
소싯적 포경 선원이었던 허먼 멜빌은 ‘고래(whale)’라는 단어의 어원을 시작으로 W형 작살받이, 고래고기 요리, 용연향, 그리고 고래의 화석에 이르기까지 고래 사냥에 대한 모든 것을 써내려 갔다. 거대한(moby) 녀석(dick), 모비딕의 또 다른 제목은 ‘백경(白鯨)’. 제42장은 고래의 흰색에 대해 분석한다. 언뜻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하얀색은 포악한 본색을 드러낼 때가 있다. 어떤 맹수들은 하얀색이라서 더 무섭다. 설원 위의 북극곰, 백호(白虎)와 백사(白蛇), 백상아리…. 바다의 색깔도 마찬가지다.
“… 선원이 그물침대에서 불려 나왔을 때 마침 항해하고 있는 심야의 바다가 우윳빛이었다면 - 주위의 곶에서 백곰이 무리 지어 헤엄쳐 오는 것 같았다면 - 그는 소리 없는 가운데 미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수의를 걸친 유령 같은 흰 바다는 진짜 유령처럼 전율을 일으킬 것이다.”(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253쪽)
바다는 항상 푸르지 않다. ‘코발트 빛 푸른 바다’라는 관용어는 호객하는 여행사의 광고문구일 뿐이다. 바다에 첨벙 뛰어들어 두 손바닥에 바닷물을 담아보자. 손안의 바다는 살색일 뿐이다. 자연의 바다는 해저의 물질 상태와 날씨에 따라 색깔을 달리한다.
세상의 색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미셀 파스투로는 “색에는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변화무쌍한 역사가 있다”(<색의 인문학>, 미술문화사)며 색의 역사를 탐구했다.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종교, 정치, 경제, 철학 등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시작하는 이번 ‘사진공책’에서는 빛의 삼원색인 파랑, 빨강, 초록을 살펴보고 검정과 하양은 인종주의와 관련해 다음번 공책에 적어보겠다.
‘파랑’은 현대 서양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다. 미셀 파스투로는 자신의 청소년 시절이던 1960년대에 ‘젊음의 제복’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청바지에서 파란색을 기억해낸다. 청바지는 알다시피 광부, 농부, 카우보이 등 노동자들을 위한 질긴 작업복이었다. 서부 개척시대에 텐트와 짐수레 덮개 천을 공급하던 외판원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식물 인디고 추출물로 파랗게 물들여 청바지를 만들었다. 장사꾼들은 질기다는 직물의 특성을 거칠 것 없는 젊음의 이미지로 변형시켰다. 1950년대 할리우드의 제임스 딘과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청바지를 입자 그것은 이유없는 반항의 상징이 됐다. 학교는 교내 청바지 착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비트족이 사라지고 로큰롤의 시대가 저물면서 반항의 청바지도 물이 빠졌다. 연해진 청바지는 스티브 잡스, 나훈아 등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입는 무난하고 편한 바지가 됐다. 반항의 파랑이 편안한 파란색으로 의미를 전환한 것이다.
고대 시대에 파란색은 온전한 색으로 인정받지 못한 ‘보이지 않는 색’이었다. 로마인들은 청색을 미개인 켈트족, 게르만족의 색깔이라 여겼다. 파란 눈의 여자는 방탕하다고 손가락질당했다. 그리스어 고문헌이나 성서에서도 파란색에 대한 어휘는 찾아보기 힘들다. 무시당했던 파란색의 가치를 드높인 사람은 성직자였다. 12세기 프랑스 사제 쉬제르는 빛의 신 하느님을 성전에 모시기 위해서 청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쉬제르는 값비싼 코발트 광석에서 추출한 청색 스테인드글라스로 상드니 수도원의 창문을 장식했다. 성화 속의 성모 마리아도 코발트 빛 망토를 걸치기 시작했다. 왕과 귀족들도 파란색에 눈길을 돌렸다.
코발트 블루가 비싸고 고귀한 색이었다면 최초의 합성 안료인 프러시안 블루는 제조비용이 저렴했다. 발명에는 운이 따랐다. 18세기 초 프러시아의 염색업자 디스바흐가 빨간색 물감을 합성하다 실수로 파란색을 만들었다. 영국 과학자 존 허셜은 프러시아 블루 제조법의 화학적 속성을 이용해 1842년 청사진(blue print) 기법을 개발했다. 다게르의 흑백 은판사진술이 공표된 지 불과 3년 만에 모노톤의 컬러 사진이 등장한 것이다. 빨강, 녹색이 추가된 컬러 사진의 출현은 19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861년 물리학자 맥스웰은 파노라마 카메라를 발명한 토머스 서턴의 도움을 받아 최초의 컬러 사진을 찍었다. 피사체는 스코틀랜드인답게 체크무늬 타탄 리본을 선택했다. 물리학자 토머스 영과 헬름홀츠의 삼원색 이론을 이용해 세 가지 색상의 필터로 촬영했다. 세상의 모든 색은 적색(red), 녹색(green), 청색(blue), 즉 RGB로 재현될 수 있다.
‘초록’은 컬러 사진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색이다. 오래된 컬러 사진이 분홍빛 세피아 톤으로 남아있는 것은 녹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휘발성 강한 녹색 안료는 그래서 ‘불안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초록빛 생명은 금세 시들어 버리는 죽음의 씨앗을 갖고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바로 이러한 녹색의 성질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다.
“드디어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 안에서 너는 거품을 일으키며 파도치다 이내 잠잠해지곤 다시 파도를 일으키는 초록빛 바다를 발견해 … 여태까지 보아 온, 그리고 앞으로도 볼 수 있는 그저 아름다운 초록빛 눈일 뿐이라고 말이야. 그런데도 끊임없이 출렁이며 변화하는 이 눈은 오직 너만이 알아볼 수 있고 …”(카를로스 푸엔테스, <아우라>, 민음사, 19쪽)
백발의 콘수엘로 부인의 조카 아우라는 초록빛 파도처럼 주인공 몬테로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신비한 초록빛은 “거품”일 뿐이며 “출렁이며 변화”할 것이라고 작가는 주인공에게 경고했다. 아름다운 아우라의 초록빛 눈동자는 언젠가는 녹슬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아우라. ‘요술을 부리는 마녀의 유혹’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몬테로는 신비한 후광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두 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을 겨우 아우라에서 해방시킨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는 촬영 연도가 1894년이라고 적힌 과거의 사진 속에서 초록 눈의 아우라를 발견했다. 아우라는 곧 늙어 죽어가는 콘수엘로 부인의 젊었을 적의 환영이었던 것이다.
기술이 좋지 않았던 18세기에 초록색은 독성 강한 비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품질 나쁜 초록색을 가까이 했던 당시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죽은 나폴레옹이 독살됐다는 음모론도 초록색 안료를 단서로 삼는다. 나폴레옹의 방 벽지가 바로 비소가 섞인 녹색이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의 초록에 대한 불안증은 십자군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조, 낙원 등을 의미하는 초록색을 숭배하는 무슬림들이 초록의 터번을 머리에 둘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녹색은 긍정의 의미를 확장했다. 세계 각국의 정부도 녹색을 좋아한다. 얼마 전 ‘휴먼 뉴딜’을 발표한 문재인 정부도 ‘그린 뉴딜’ 정책을 내세웠다. 한국 녹색 정책의 원조는 박정희다. 1972년 새마을운동 담당관이었던 고건 전 총리는 새마을운동 깃발과 배지에 넣을 마크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도안을 만든 사무관은 네모난 깃발의 초록색 바탕은 넓고 기름진 평야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초록 잎 세 개는 근면, 자조, 협동을 의미한다.
‘빨강’은 보이지 않았던 파랑과 달리 눈에 띄는 역사를 갖고 있다.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그림인 동굴벽화에서부터 붉은색은 등장했다. 색깔을 의미하는 고대 로마시대의 언어인 라틴어 ‘coloratus’는 빨갛다는 뜻도 품고 있다. 스페인어 ‘colorado’ 역시 마찬가지. 러시아어 ‘크라스나야’는 ‘붉다’는 뜻과 함께 ‘아름답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은 빨간색 광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이란 뜻이다.
공산당이 좋아하는 빨간색의 역사는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됐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발생했던 1789년 프랑스 제헌의회는 폭동 발생 시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의미로 적색기를 게양할 것이라고 공포했다. 경고의 의미였다. 1791년 상드마르스 광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망명을 시도하다 붙잡힌 루이 16세의 폐위를 촉구하는 군중의 해산을 위해 꽂은 적색기는 민중의 피로 물들었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영국의 노동가요 ‘적기가(赤旗歌)’의 가사처럼 붉은 깃발은 민중의 저항을 상징했다. 1906년 창당한 영국의 노동당도 적색기를 꽂았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민족인 중국과 구소련 공산정권은 나라 깃발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한국처럼 레드 콤플렉스가 강한 나라가 또 있을까? 대선 레이스 초반부터 ‘미군 점령군’에 대한 색깔론이 불거졌다. 알면서도 잘 먹히니까 다시 써보는 수법이었을까? 여당과 제1야당의 상징 색깔처럼 의뭉스럽다. 더불어민주당은 무난하고 보수적인 느낌이 강한 파란색으로, 국민의힘은 빨간색으로 당의 로고를 색칠했다. 2012년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개명하며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꾼 당의 상징색을 국민의힘은 고수하고 있다. 미국의 양당을 흉내 내고 싶었던 것일까? 중도우파 공화당은 빨간색을, 중도좌파 민주당은 파란색을 사용한다. 당의 결정이 아니라 언론이 색칠했다. 2000년 대선 개표방송을 진행하는 언론들이 미국의 지도에 파란색과 빨간색을 칠해가며 승패를 보도하면서 색깔이 정해졌다. 공화당(Republican)의 ‘R’과 빨강(red)의 ‘r’이 똑같아서 공화당을 빨간색으로 표시했다는 설이 있으니 색깔의 속성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던 셈이다. 다만 두 정당을 시각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색깔을 성조기의 색에서 찾았을 것이다. 미셀 파스투로가 말하는 색의 첫 번째 기능은 “구분하고 분류하고 결합하고 대립시키고 계층화하는 것”이다.
색깔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유럽의 전래동화가 있다.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는 소녀가 할머니로 변장한 늑대에게 잡아먹힌다는 <빨간 모자> 이야기다. 왜 소녀는 하필 빨간색 모자를 쓰고 다녔을까? 역사가들은 고대 문헌을 참고했다. 사건이 일어난 때가 빨간색 옷을 입고 다니는 성령강림 대축일이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는 성적으로 해석했다. 늑대같은 남자와 잠자리에 들고 싶어 하는 사춘기 소녀의 성적 욕망의 징후라는 것이다. 색의 역사학자 미셀 파스투로는 기호학으로 풀이했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녀가 ‘검은’ 옷을 입은 할머니에게 ‘하얀’ 버터를 가져다준다는 텍스트에서 색의 구성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 문화의 색채에서 기본을 이루는 빨강, 검정, 하양은 다른 동화에도 반복된다. 동화 <여우와 까마귀> 속 ‘붉은’ 여우는 ‘검은’ 까마귀가 놓친 ‘하얀’ 치즈를 물고 달아나고, ‘백설’ 공주는 ‘검은’ 옷을 입은 마녀가 건넨 독이 든 ‘빨간’ 사과를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뉴턴은 일곱 색깔 무지개색도 발견했다. 1704년 뉴턴의 <광학(Optics)>이 출판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플라톤처럼 색깔들이 흰색과 검은색의 혼합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가령 백색광에 검은색이 약간 섞이면 빨간색이 되고 파란색으로 변했다가 검은색이 된다고 믿었다. 뉴턴은 빨간색과 파란색을 발견했던 데카르트의 프리즘 실험을 좀 더 확장했다. 5㎝의 짧았던 프리즘 투사 거리를 6.6m로 늘리자 백색광은 무지개색으로 분리됐다. 일곱 색깔 무지개는 아니었다. 실험실의 무지개에 남색은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무지개가 일곱 색깔이기를 원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계도 일곱 개였고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도 ‘7’이었다. 색의 과학에 문화라는 첨가제가 뿌려져 일곱 색깔 무지개가 된 것이다.
여덟 가지 색깔의 무지개도 있다. 1978년 예술가 길버트 베커가 고안한 성소수자의 깃발은 핑크가 추가된 여덟 가지 색깔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이 어려웠던 핑크가 제외됐고, 깃발을 2개로 나누어 들고 행진하기 위해 남색도 없애버렸다. 무지개색은 이렇게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최대 200개의 색깔을 구분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은 그렇게 복잡한 무지개도 원하지 않았다. 중간 즈음에는 초록색 계열이, 그리고 양쪽으로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펼쳐지는 가시광선의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의 색계는 딱 그만큼의 세상이다. 무지개 너머(Over the Rainbow)에는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