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길목, 차별·혐오의 언어로 소비되는 ‘페미니즘’

박광연·유설희 기자
서울 종로구 한 서점 외벽에 그려진 윤석열 전 검찰총장 부인 김건희씨를 비방하는 ‘쥴리 벽화’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30일 오전 한 건물 관계자가 벽화의 글자를 흰색 페인트로 지우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한 서점 외벽에 그려진 윤석열 전 검찰총장 부인 김건희씨를 비방하는 ‘쥴리 벽화’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30일 오전 한 건물 관계자가 벽화의 글자를 흰색 페인트로 지우고 있다. 연합뉴스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길목에서 ‘페미니즘’이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정치권에 소환되고 있다.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의 ‘숏컷’에 덧씌워진 여성 혐오, 저출생 원인을 남녀 교제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건강한 페미니즘’이라는 구분을 지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에서 페미니즘은 남·녀 갈등을 부추기는 차원으로 재생산됐다. 윤 전 총장의 부인 김건희씨를 비방하는 내용의 ‘쥴리 벽화’에서 드러난 여성 혐오에 대해선 뒷짐을 쥐고 있기도 했다. 이해득실에 따라 젠더 갈등에 편승하고 혐오를 ‘방관’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심화된 불평등·양극화 해소가 주요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페미니즘이 특정 집단의 분노를 자극해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려는 적대적 언어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풀어가는 미래 의제 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차별·혐오·배제로 소비되는 페미니즘

서울 종로구에 등장한 ‘쥴리의 남자들’ 벽화는 대선 국면에서 여성 혐오 문제를 촉발시켰다. 여권 성향의 유튜브 방송이 윤 전 총장 부인 김씨를 두고 제기한 ‘유흥업소 종사 의혹’은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채 대선 후보 검증이라는 명분으로 무분별한 사생활 들추기라는 지적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쥴리 벽화’에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다가 논란이 커지자 하루 늦게 “인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 안산 선수의 짧은 머리를 페미니즘과 연관시킨 사이버폭력은 정치권을 통해 ‘여성혐오 옹호’ 논란으로 재생산됐다. 양준우 국민의힘 대변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논란의 시작은 허구였으나, 이후 안 선수가 남혐(남성 혐오) 단어로 지목된 용어들을 사용한 것이 드러나면서 실재하는 갈등으로 변했다”고 주장한 것이 발단이었다. 책임을 안 선수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양 대변인을 옹호하며 정치적 공방으로 비화됐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왼쪽)가 지난달 8일 국회에서 열린 신임 대변인단 임명장 수여식에서 양준우 대변인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왼쪽)가 지난달 8일 국회에서 열린 신임 대변인단 임명장 수여식에서 양준우 대변인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전 총장의 페미니즘 발언은 대선 후보가 직접 논란을 자초한 경우다. 윤 전 총장은 지난 2일 저출생 문제를 두고 “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악용돼 남녀간 건전한 교제도 정서적으로 막는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도 건강한 페미니즘이어야지 페미니즘을 선거에 유리하게 하고 집권연장에 유리하게 해선 안된다”고도 했다. 페미니즘과 저출생을 연결했다는 자체가 낮은 수준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젠더 갈등에 편승한 발언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6월 “여성이라고 꽃처럼 대접받기 원한다면 항상 여자는 장식일 수밖에 없다. 페미라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가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가 아니다. 대한민국 모든 여성의 삶이 곧 페미니즘이고, 모든 성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비판한 일도 있다.

최근 잇따른 논란 속에서 페미니즘이 혐오와 차별, 배제의 언어로 다뤄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성별뿐 아니라 계급, 장애 등에 따른 차별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을 페미니즘으로 본다면, 최근 논쟁은 한국 사회의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정치권, 특정 지지세력 확보 위해

정치권이 대선 국면에서 혐오와 차별로 페미니즘을 소비하는 까닭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용이하다는 판단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권 대표는 “한국 정치는 특정 집단의 지지를 얻어야만 지도자급으로 부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선 길목, 차별·혐오의 언어로 소비되는 ‘페미니즘’

페미니즘 논란으로 표를 얻을 수 있는 특정 계층은 주로 20대 남성(이남자)이다. 20대 여성(이여자)을 대립각으로 세우며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이남자 일각의 ‘역차별’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이 활용된다. 가깝게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당선 요인 중 하나로 설명되기도 했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은 “안티페미니즘을 통해 이남자 표를 얻어보려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고 최근 상황을 진단했다.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저출생 문제가 단일 변수로 설명할 수 없는 총체적인 문제임은 최소 20년 이상의 공론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에 이르렀다”며 “단순히 페미니즘 문제로 재단해버린 윤 전 총장 발언은 한국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력의 부재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정치권 문화가 배경에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안소정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정치권이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정리해가야 하는데 오히려 편승하거나 옹호하고 있다”며 “이는 여성 유권자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가부장적인 ‘형님 문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페미니즘, 어떻게 다뤄져야 하나

페미니즘 이슈가 대선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지난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결과를 통해 표심의 흐름을 예측해보려는 시각도 있다. 민주당 소속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성비위로 발생한 선거에서 민주당은 피해자 사과 등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그 결과 서울 20대 여성의 15.1%가 거대 양당이 아닌 제3후보를 선택한 것으로 출구조사에서 확인됐다. 전체 집단 중 제3후보 선택 비중이 가장 높았다.

국민의힘에 입당한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초선 공부모임 ‘명불허전 보수다 시즌5’ 초청 강연에 참석해 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에 입당한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초선 공부모임 ‘명불허전 보수다 시즌5’ 초청 강연에 참석해 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쥴리 벽화’ 논란에서 민주당의 한발 늦은 비판 목소리, 국민의힘에서 나온 안산 선수 관련 ‘여성 혐오 옹호’ 논란과 윤 전 총장의 페미니즘 발언 여파까지 고려한다면 20대 여성의 표심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할 가능성이 높다. ‘어게인 4·7 보궐선거 표심’인 셈이다.

다만 페미니즘 논란의 영향을 가늠하기에 이른 시점이라는 주장도 있다. 서 대표는 “아직 대선 후보들이 구체적 정보를 내놓지 않아 유권자들의 판단이 형성되지 않았다”며 “보궐선거와 대선은 전개 양상이 다르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선 후보들을 비롯해 정치권이 대선 국면에서 페미니즘을 다루는 방식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페미니즘이 성평등을 지향하는 가치라는 점에서 남녀 이분법의 갈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코로나19 이후 돌봄·노동·성장 등 사회 구조 전반의 변화를 다루는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 대표는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전망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저성장과 인구 감소 등에 직면한 한국 사회가 어떻게 지속 가능할지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남녀가 가족과 시장과 사회 안에서 공존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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