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지상주의 떨쳐낸 선수들…금 아니어도 ‘굿’

한국 이다빈(왼쪽)이 지난달 27일 일본 마쿠하리 메세홀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여자태권도 67㎏ 초과급 결승에서 세르비아 밀리차 만디치에게 패한 뒤 상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화답하고 있다. 도쿄 | 연합뉴스
1996년 애틀랜타 여홍철
2004년 아테네 ‘우생순’
눈물로 기억됐던 은메달
오랜 스포츠팬들의 기억 속에는 ‘통한의 은메달’들이 존재한다. 1984년 LA 올림픽 유도 남자 60㎏급의 김재엽은 일본의 호소카와에게 굳히기로 눌려 꼼짝 못하고 패했다. 김재엽은 도복을 여미며 눈물을 흘렸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 체조 도마에서 여홍철은 2차 시기 착지에서 뒤로 크게 물러나며 은메달을 땄다. 착지 순간 여홍철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의 은메달은 가장 슬픈 은메달로 남아 있다. 덴마크와의 결승전은 2차 연장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였다. 패한 대표팀은 눈물바다가 됐고, 영화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우생순)의 모델이 됐다. ‘우생순’은 ‘한(恨)’과 동의어로 통할 정도다.
2020 도쿄 올림픽, 한국 대표팀의 은메달은 과거와 달랐다. 더 이상 ‘통한의 은메달’은 없다. 첫 은메달은 지난달 27일 펜싱 여자 에페 단체에서 나왔다. 세계 최강 중국을 준결승에서 꺾은 대표팀은 에스토니아와의 경기에서 역전패를 당했다. 9경기 마지막 선수였던 에이스 최인정이 미안함과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지만 강영미, 송세라, 이혜인 등이 얼른 피스트로 올라와 최인정을 다독였다.
여자 에페 대표팀은 이내 밝은 표정으로 시상대에 섰다. 나란히 손을 잡은 뒤 8개의 손을 한꺼번에 힘껏 들어올렸다. 밝아진 표정에 은메달리스트의 자부심이 묻어났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월계관 반지’를 꺼내 보이며 ‘반지 세리머니’를 했다.
같은 날 바로 옆 경기장에서 태권도 여자 67㎏급 결승이 열렸다. 이다빈은 세르비아의 밀리차 만디치와 치열한 공방 끝에 7-10으로 졌다. 경기가 끝난 뒤 이다빈은 만디치에게 다가가 ‘엄지척’을 해주며 승리를 축하했다. 이다빈은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를 위해서 모두가 다 힘들게 훈련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노력을 알기 때문에 그 선수의 승리를 축하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선수보다 부족한 점이 있으니까 은메달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유도 국가대표 조구함이 29일 일본 도쿄 지오다구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유도 남자 100kg급 결승에서 일본 울프 아론에게 패한 뒤 손을 들어주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번 올림픽 국가대표들은
‘은메달리스트’ 자부심 충만
사격 김민정 “정말 즐거워”
태권도 이다빈 “1등에 축하”
지난달 29일에는 남자 유도 100㎏급 결승이 열렸다. 조구함은 일본의 울프 아론과 연장 5분30초가 넘도록 치열한 경기를 했다. 조구함도 울프도 온몸이 땀에 젖었다. 힘겹게 버텨내던 조구함은 울프의 안다리 후리기에 걸리며 절반패를 당했다. 유도의 성지 무도관에서 열린 올림픽 결승, 기필코 이기고 싶었던 조구함이었지만 울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힘껏 들어줬다.
지난달 30일에는 사격 대표팀 김민정이 여자 25m 권총에서 은메달을 땄다. 선두를 다투던 비탈리나 바사라쉬키나(ROC)와 슛오프 끝에 졌다. 김민정의 표정에는 미소가 번졌다. 김민정은 “너무너무 열심히 준비해서 걱정이 별로 없었다”며 “경기를 하면서 재미있었다. 정말 뜻깊은 첫 메달”이라고 말했다.
2020 도쿄 올림픽의 은메달은 ‘우정의 상징’이 됐고, ‘부족함’을 깨닫는 계기이자, ‘다음’을 향한 의지가 된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메달’이 아니라 이를 향한 “여정 자체가 보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