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달보다 큰 울림…우리를 뭉클하게 한 올림픽 전사들의 ‘말, 말, 말’
개인전에선 조용히…
목이 쉬어 빠이팅 못해요
김제덕(17)의 “빠이팅” 소리는 2020 도쿄 올림픽의 시작을 알렸다.
첫날부터 메달 사냥을 시작한 양궁장에서 대표팀 막내 김제덕은 우렁차게 “빠이팅”을 외쳐댔다. 늘 신중하게 집중하며 활을 쏘는 양궁장 특유의 적막을 깬 파이팅 소리는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대한민국 선수단의 최대 히트작이 됐다.
경기 뒤 인터뷰에서도 늘 ‘빠이팅’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혼성단체전과 남자단체전 금메달로 2관왕에 오르는 동안 끊임없이 파이팅을 외쳤던 김제덕은 마지막 남자 개인전을 앞두고는 차분하게 경기하겠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목이 쉬어서”라고 답해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쾌활하고 패기 넘치는 소년 궁사 김제덕은 효자이기도 하다. 요양병원에서 TV를 보며 응원하던 할머니가 어릴 적 손자와 추억을 떠올린 듯 “제덕아, 개밥 주러 가자”라고 외치는 모습은 많은 국민을 뭉클하게 했다. 할머니 손에 자랐고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는 김제덕은 귀국 후 인터뷰에서도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사랑해”를 외치는 착한 소년의 모습으로 더욱 사랑받았다.
올림픽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메달을 딴 선수도 못 딴 선수도 모두가 각자의 사연을 갖고 나선다. 경기 뒤 믹스트존에서 땀 혹은 눈물을 닦으며 털어놓는 선수들의 이야기는 승부보다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아보고 싶었습니다
펜싱 남자 사브르팀의 맏형 김정환(38)은 인터뷰의 제왕이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하고 표현력이 뛰어나다. 무엇보다 ‘인터뷰 지구력’이 압도적이다. 보통 선수들은 경기 직후 통과하는 믹스트존에서 인터뷰를 5분 내외면 마치지만 김정환은 남다르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개인전 동메달을 딴 뒤 장시간 인터뷰를 쏟아내더니 이번 대회에서도 개인전 동메달을 딴 뒤 믹스트존에서 지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도저히 적을 수 없어 녹음했더니 무려 16분30초.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은퇴했을 때 지금의 아내와 소개팅한 이야기까지 꺼내며 취재진을 들었다놨다 하던 김정환은 은퇴했다가 돌아온 이유에 대해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부터 이번 대회까지 한국 펜싱 사상 최초로 3회 연속 올림픽 메달을 따내 역사를 새로 쓴 김정환은 단체전 금메달까지 따내며 그야말로 새하얀 눈에 첫 발자국을 새겼다.
‘쫄지 말고 대충 쏴’
중얼거렸더니 맘 편해져
안산(20)은 대담하고 배짱 좋은 신세대의 모습으로 인기를 끌었다. 양궁 여자대표팀의 막내지만 오히려 가장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단체전 인터뷰에서도 스스럼없이 마이크를 잡으며 팀을 대표하기도 했다. 대범한 안산의 모습은 3관왕에 도전하던 여자 개인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연장 슛오프까지 갔던 준결승전에서 상대 옐레나 오시포바(ROC)의 심박수가 168로 치솟은 반면 안산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119의 놀랍도록 안정된 심박수와 함께 10점을 명중시켜 결승에 진출했다. 경기 뒤 ‘무슨 생각을 하며 쐈느냐’는 질문에 안산은 “‘쫄지 말고 대충 쏴’라고 중얼거렸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해 그야말로 ‘멘털 갑’의 위용을 드러냈다.
그렇게 했는데 안 되면
더 열심히 해야겠죠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선수들에게 피, 땀, 눈물의 시간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무려 5년 만에 열린 이번 올림픽에서 ‘배드민턴 천재’ 안세영(19)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17년 12월 최연소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단 안세영은 국제대회에서 빠르게 성장해 이번 대회 여자단식 메달에 도전했다. 국가대표가 돼 올림픽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했던 안세영은 8강에서 세계랭킹 2위의 강적이자 천적을 만나면서 생애 첫 올림픽을 마쳤다. ‘코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직 소녀인 안세영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될지 모른다는 얘기에도 올림픽은 분명 할 거라 믿고 정말 열심히 했다”며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되는 거면… 아마 그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겠죠”라며 뚝뚝 떨어지던 눈물을 닦아 취재진의 가슴을 후벼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