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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8.19 03:00

수정 2021.08.1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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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주체

많은 물리학자의 생각에는 공통점이 있다. 객체와 주체는 투명한 유리창으로 나뉘고, 내가 본다고 유리창 너머 객체의 상태가 변할 리 없다고 믿는다. 주체와 독립된 객체로서의 대상이 있고, 주체의 인식은 객체의 객관적인 속성을 충실히 반영한다는 믿음이다. 내가 보나 안 보나 달은 규칙적으로 모습이 바뀌고, 뉴턴 이전에도 사과는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땅으로 떨어졌다. 세상 속 주체의 위치를 비우고 그곳에 무엇을 놓아도 우주에는 바뀌는 것이 전혀 없다. 내가 보지 않아도 달은 그곳에 있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주체-객체 독립성이라는 나의 오랜 확신이 요즘 줄어들고 있다. 확률의 주관성을 말하는 베이지언(Bayesian) 통계학의 부상, 시간의 흐름이 주체의 인식 능력의 한계에서 비롯할 가능성, 관찰 주체가 정보를 얻는 과정을 고려하는 정보엔진, 그리고 우주론의 인류원리까지. 과학은 여러 분야에서 점점 더 주체를 발견하고 있다. 물리학의 자연법칙에도 주체의 자리가 정말 있는 것일까? 난 요즘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혼란스럽다.

동전을 던지면 2분의 1의 확률로 앞면이 나온다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던져보라. 100번 던지면 딱 50번 앞면이 나올 리 없다. 동전을 던지는 횟수를 늘리면 확률이 2분의 1을 향해 수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도 확실치 않다. 동전의 모습과 던지는 방법에 따라 최종 확률이 다를 수 있다. 오히려, 그동안의 관찰 결과로 지속적으로 예측을 수정해가는 것이 합리적인 확률 계산법일 수 있다. 베이지언 통계학에서는 객관적인 확률은 존재하지 않으며, 확률은 주관적 믿음을 표시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양자역학 해석 가운데 하나인 큐비즘(Quantum Bayesianism, QBism)에서도 양자상태를 객관적 실체가 아닌 것으로, 측정 결과에 대한 주관적 관찰 주체의 믿음의 정도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한다. 양자역학적인 대상과 측정장치 사이의 상호작용보다 장치의 눈금을 읽는 주체의 행위에 주목하는 해석이다. 양자역학 표준해석에서의 확률이 객관적 확률이었다면, 큐비즘의 확률은 주관적 확률이다. 양자역학의 큐비즘 해석도 주체를 말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물리학의 다른 기본법칙과 달리 시간의 방향성을 말한다. 1부터 10까지 숫자가 적힌 카드가 정돈되어 쌓여 있다. 이를 A상태라 부르자. 카드를 여러 번 섞으면 마구잡이로 섞인 B상태가 된다. ‘정돈된 상태’나 ‘마구 뒤섞인 상태’ 각각에 대응하는 카드의 배열이 몇 개인지 세면 엔트로피를 얻는다. 정돈된 상태에는 카드의 배열이 딱 하나지만, 마구 섞인 상태에는 가능한 배열이 여럿이다. B상태가 A상태보다 엔트로피가 크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정돈된 상태가 뒤섞인 상태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이 시간의 진행 방향이다. 시간의 화살은 과거에서 미래를 향한다.

마구 뒤섞어 도달한 B상태의 카드 한 장마다 “가, 나, 다, … 자, 차”를 순서대로 적고 보면 이제 오히려 B상태가 ‘가나다’의 입장에서 정돈된 상태다. 앞서 카드를 뒤섞는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을 거꾸로 틀면, ‘가나다’의 입장에서 본 카드더미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마구 뒤섞이는 모습으로 보인다. ‘123’을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엔트로피가 늘어나지만, ‘가나다’를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더 심각하다. 마구 뒤섞인 상태라고 우리가 흐릿하게 뭉뚱그려 표현한 여러 다양한 배열도, 카드의 모든 정보를 남김없이 파악할 수 있는 주체에게는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유일한 상태로 보인다. 엄청난 지각 능력을 가진 이 주체에게는 A상태나 B상태나 엔트로피가 같다. 그렇다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은 자연의 객관적인 속성이 아니라 주체가 대상을 흐릿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비롯되는 환상인 걸까? 흐릿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없어도 시간은 흐르는 걸까? 아니, 과연 시간은 존재하는 걸까?

100년 뒤 물리학은 어떤 모습일까? 여러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체의 부상은 과학이 짧게 앓고 지나갈 가벼운 몸살일까, 미래의 과학이 만들어지고 있는 고통스러운 용광로일까?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눈을 감아도 그곳에 달이 있다고 오래 믿었던 나는 요즘 고민이 많다. 내가 보지 않으면, 달은 있고 없고를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주체 없는 과학은 환상일까? 과학에도 주체의 자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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