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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흘리는 땀에는 성별이 없다”

  •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다큐 인사이트 : 국가대표’로 본… 여성 스포츠인으로 산다는 것

스포츠의 판도를 바꾼 여성 스포츠인 박세리(골프), 김연경(배구), 지소연(축구), 김온아(핸드볼), 남현희(펜싱), 정유인(수영)이 출연해 자신이 몸담은 분야의 차별과 불평등에 맞선 투쟁기를 들려준 KBS <다큐 인사이트 : 국가대표>는 지난 8월12일 방송 후 온라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해당프로그램 화면 캡처

스포츠의 판도를 바꾼 여성 스포츠인 박세리(골프), 김연경(배구), 지소연(축구), 김온아(핸드볼), 남현희(펜싱), 정유인(수영)이 출연해 자신이 몸담은 분야의 차별과 불평등에 맞선 투쟁기를 들려준 KBS <다큐 인사이트 : 국가대표>는 지난 8월12일 방송 후 온라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해당프로그램 화면 캡처

절기란 참 신기하다. 입추가 지나자 귀신같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불볕더위와 함께 2020 도쿄 올림픽도 끝났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많은 스타가 탄생했다. 올림픽이 끝나면 으레 그렇듯이,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기대와 함께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특히 예능은 ‘얼짱’ ‘국민 여동생’ ‘성공해서 돈 많은’ 프레임에 여성 선수를 끼워 넣는 요주의(?) 프로그램.

지난 8월12일, KBS는 <다큐 인사이트 : 국가대표>를 방송했다. 공식 소개는 다음과 같다. “2020 도쿄 올림픽이 선사한 여운과 감동을 이어 스포츠의 판도를 바꾼 여성 스포츠인 6인의 통쾌한 목소리를 담았다.” 박세리, 김연경, 지소연, 김온아, 남현희, 정유인이 출연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방송 후 온라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남녀 선수의 비율이 일대일에 근접한 2020 도쿄 올림픽과, 그동안 행해진 성차별적 중계방송이나 여성 혐오적 공격이 방송의 의미를 입증했다. 48분짜리 <다큐 인사이트>가 쏘아 올린 공은 작지만 단단하고, 뜨겁다.

국가대표라는 소재와 올림픽이라는 사건이 만나면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소위 ‘국뽕’이다. 게다가 해당 분야의 걸출한 스타, 전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의 선수 시절 업적만 모아도, 시청자는 뿌듯함을 대리 섭취할 수 있다. 그러나 <다큐 인사이트 : 국가대표>는 선수의 화려한 성취를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배구선수 김연경은 여자배구 선수에게만 붙는 ‘미녀군단’이라는 표현에 의문을 느끼고, 축구 선수 지소연은 머리를 기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많은 관계자로부터 받았던 일화를 털어놓는다. 수영 선수 정유인은 탄탄한 팔뚝 때문에 ‘여자 마동석’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는데, 예전에는 그런 몸이 여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포토샵으로 근육을 줄였다고 말한다. 골프의 전설 박세리마저, “외모가 더 예뻤으면 더 잘됐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 올림픽에도 유독 여성 선수의 외모를 트집 잡아 잡음을 일으키는 차별주의자가 많았다. 선수를 ‘요정’ ‘공주’ ‘낭자’라고 호명하는 중계 또한 같은 맥락이다. 여성 국가대표에서 국가대표가 아닌 ‘여성’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다. 이렇게 선수를 과도하게 여성화하는 차별은 너무나 만연해서, 발언을 하는 사람은 차별하는 줄 모르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조차 식상한 지적이 아닌지 걱정할 정도다.

“‘예뻤으면 더 잘됐을 것’ 소리 들어” “포토샵으로 팔뚝 근육 줄여”
김연경·박세리 등 한국 스포츠를 빛낸 여성 선수 6인의 육성 담아
실력이 아닌 ‘여성’에 방점을 찍는 기존 미디어 관행에 문제 제기

<다큐 인사이트>의 이은규 PD는 8월17일 경향신문 인터뷰(‘국가대표’ 성차별 짚은 이은규 PD, 여성 다큐 계속 만드는 이유)에서 기존의 미디어가 여성 선수를 다루는 관행에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밝혔다. “미디어가 그려놓은 여성 선수들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한결같았다.” “과거 운동하는 여성을 다룬 다큐들을 보면, 꼭 여성 선수들이 수를 놓거나 뜨개질하는 모습이 나와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에는 호돌이 모양 수를 놓기도 하고요(웃음). 김연경 선수도 흥국생명 시절 숙소에서 뜨개질하는 영상이 있더라고요.”

누구인가? 누가 또 “알고 보면 천생 여자” 소리를 내었는가? 뛰어난 여성 선수를 ‘위협적이거나’ ‘낯설지 않’은 여자로 납작하게 누르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불시에 솟아오른다. <다큐 인사이트>는 올림픽에서의 성차별적인 중계방송, 여자축구 선수들에게 집에 치마가 몇 벌 있냐고 물어보는 장면, 운동할 때 좀 웃을 순 없냐는 질문을 받고 할 말을 잃은 박세리 선수 등의 자료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인터뷰는 다큐멘터리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내러티브의 틀이다. 인터뷰와 질문이 방향성을 결정한다. 2017년 SPOTV 채널이 제작한 김연경 다큐멘터리 <우리 누나, 김연경>에서 대뜸 김연경에게 “이제 서른 되시네요?”라고 놀린 것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더욱 선명하다.

<다큐 인사이트>에서 여성 선수들은 자주 흑백 처리된다. 상반신까지만 앵글에 잡힌 채 편안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과도하게 웃거나 앉아 있는 다리 모양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발화자에게 집중하여 메시지를 부각하는 연출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자신이 몸담은 분야의 차별과 불평등에 맞선 선수들의 투쟁기를 듣는다. 김연경은 지속해서 여자 배구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낮은 샐러리 캡을 비판했다. ‘샐러리 캡’(salary cap)은 한 팀 선수들의 연봉 총액이 일정액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제도이다. 여자배구는 남자배구보다 성적도 좋고 인기도 많지만, 샐러리 캡 금액이 적고 더 자주 동결된다. 이렇게 되면 여자배구 선수의 연봉은 남자배구 선수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박세리 역시 남자 선수와 여자 선수의 임금 차별을 지적한다. 2019년 기준 미국프로골프(PGA)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상금은 약 6배 차이가 난다(남자는 4억1400만달러, 여자는 7130만달러. 총상금과 보너스를 합산한 금액). 지소연은 축구의 종주국에서, 무려 첼시 팀에서 뛰는데도 훨씬 더 열악한 여자 축구 환경에 놀라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핸드볼 선수 김온아는 여자핸드볼이 더 많은 메달을 땄음에도 여자 지도자가 없는 현실을 말한다. “어릴 때는 솔직히 생각을 못했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왜 메달리스트 언니들이 지도를 안 할까? 자리가 없는 걸까?” 여자핸드볼은 2020 도쿄 올림픽 8강 경기 중 강재원 감독이 선수들에게 폭언하면서 큰 비판을 받았다.

<다큐 인사이트>는 여성 운동 선수의 투쟁과 자부심, 그리고 두렵지만 목소리를 내겠다는 용기를 조명한다. 성별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투명한 욕망을 사회는 지금까지 손쉽게 짓밟고 일그러뜨렸다. 세계적인 선수에 페미니즘 이슈를 비비지 말라고 울컥한다면, 바로 자신 같은 인간이 여성 운동 선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성 운동 선수는 자신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반발하는 것조차 욕을 먹을까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성 참가자가 한 명도 없었던 최초의 올림픽부터, 성비가 일대일에 근접한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여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큐 인사이트>는 이 연대와 투쟁의 역사를 한국 너머로 확대한다. 운동계의 남녀 임금 차별을 다룰 때는 빌리진 킹을 소개한다. 1970년대 여자테니스 선수 세계 랭킹 1위의 빌리진 킹은 남자 선수에 비해 터무니없는 상금에 반발했다. 그리고 이를 비웃는 전(前) 윔블던 챔피언 바비릭스와 대결을 펼쳐 세계적인 화제를 뿌렸다. 현재 테니스는 남녀 대회의 상금이 비슷한 얼마 되지 않는 종목이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기계체조 독일국가대표팀이 전신을 가리는 경기복을 입은 사실이나 세계적인 여자축구 선수 메건 라피노가 ‘동일한 기록과 트로피, 낮은 임금’을 비판한 연설도 짚고 넘어간다. 다양한 사례를 유기적으로 엮으면서 주제 의식을 관통하는 힘은 세졌다.

다큐멘터리는 때때로 현실 그 자체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의 편집을 거치는 순간 현실은 선별과 배제를 거친 ‘구성물’로 거듭난다. 다큐멘터리 속 사람은 현실 그 자체로 보이지만, 이러한 가공 속에서 재현된 인물이다. 재현은 선택과 제시, 구조화와 형태 결정의 능동적인 작업이다. 재현은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사물들의 의미를 생산하는 능동적인 실천이다. 우리가 현실의 대상을 어떻게 재현하고, 전달할지에는 의도와 여과가 개입한다. 결과물은 그 총합의 반영이다.

똑같은 사람을 누군가는 뜨개질하는 여성으로, 누군가는 ‘우리 누나’로, 누군가는 강인한 국가대표로 그려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재현된 여성 선수만을 봤으며, 그 속에서 지워진 어떤 이야기를 원했는가? <다큐 인사이트>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하게 건드렸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덧붙여, 다양한 여성 운동 선수와 입체적이고 진솔한 이야기에 목말랐다면 E채널 예능 <노는 언니>를 추천한다. 정유인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자신의 근육에 감탄하는 시청자와 만나, 더는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매회 다양한 종목의 게스트가 출연해서 상식도 쌓을 수 있고, 여성 운동 선수끼리 나누는 생리 문제 같은 현실적인 고충도 들을 수 있다. 고정 출연진의 ‘케미’에서 나오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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