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특권
케이트 만 지음·하인혜 옮김 | 오월의봄 | 348쪽 | 1만9000원
브렛 캐버노와 힘패시 문제를 다룬 구글 이미지 검색 결과.
“의원님들은 이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싶은 거죠?” 미국 공화당 의원 린지 그레이엄이 2018년 9월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 브렛 캐버노 인준 청문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에게 한 말이다. 캐버노는 1982년 크리스틴 블래시 포드를 성폭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그레이엄은 캐버노에겐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이나 당신 가족이 겪었을 고초를 상상하기도 어렵군요.” 이후 폭스뉴스에 나와선 “캐버노 판사의 인생을 망친다고 해서 자기(포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라고 했다.
저자 케이트 만(미국 코넬대 철학과 부교수)은 당시 캐버노 사건이 ‘힘패시(himpathy·him+sympathy)’를 잘 보여준다고 했다. 힘패시는 ‘남성 가해자가 여성 피해자를 대상으로 범죄행위, 성폭행, 성추행 혹은 다른 여성혐오 행위를 한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남성 가해자에게 쏟아지는 압도적 수준의 공감’이다.
만은 “힘패시는 여성을 짓밟는 폭압자를 ‘좋은 남자’로 포장함으로써 보호한다”고 했다.
힘패시에 동반되는 것은 ‘피해자 비난하기’다. 미투로 36년 전 사건을 폭로한 포드는 청문회 이후 그녀와 가족들을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에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캐버너는 대법관이 됐다.
‘여성 피해자 지우기’가 힘패시, 피해자 비난하기와 더불어 작동한다. 스탠퍼드대 수영 선수 브록 터너는 만취 여성을 성폭행했다. 지인들은 “불운한 상황” 같은 말로 공감했다. 여러 언론은 피해자를 언급하지 않은 채 터너의 수영 실력과 전도유망한 앞날을 잃게 된 것을 앞다퉈 보도했다. 판사는 양형이 길어지면 터너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일 수 있다고 염려했다. 터너는 6개월의 징역 형 중 3개월만 복역했다.
책은 “여성혐오, 힘패시, 남성 특권이 여타의 억압적 시스템과 결합해 작동하면서 불공평하고 왜곡된, 때로는 기이한 결과를 낳는 과정”을 좇아간다. 만은 “(여성혐오의 결과물은) 여성이 여성적 재화로 여겨져온 것들(섹스, 돌봄, 양육, 재생산 노동)을 특정 남성 다시 말해 종종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남성들에게 제공하도록 요구받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대대로 남성적 재화로 여겨져온 것들(즉 권력, 권위, 지식에 대한 권리)을 소유하지 않도록 요구받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재화들은 특권적인 남성들이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암묵적으로 동의가 이루어진 것들이다. 여성들은 남성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할 경우 처벌과 보복을 받는다.”
‘인셀’(비자발적 독신 남성)들의 살인 사건도 연장선에 있다. 2014년 엘리엇 로저는 여학생 전부를 죽이려 계획하고, 캘리포니아주립대 샌타바버라 캠퍼스 기숙사로 가 총기를 난사했다. 7명이 죽었다. 로저는 앞서 “여자들은 다른 남자들에게 잘도 반하고, 섹스하고, 연애하면서 나에게는 한 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육성을 유튜브에 남겼다. 2018년엔 스콧 폴 비얼리가 플로리다주 탈하시에 있는 요가 스튜디오로 가 여성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사춘기 내내 “거절당한 청소년”이라는 보복 판타지 서사를 썼다. 여섯 명에게 총을 쏘아 그 중 두 명이 사망했다. 비얼리는 로저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로저가 영향을 준 또 다른 이는 토론토에 인도로 차를 몰아 보행자 열 명을 죽인, 알렉 미나시안이다. 그는 범행 전 페이스북에 “인셀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채드와 스테이시를 죽일 것”이라고 썼다. 채드는 매력적인 백인 남성, 스테이시는 채드의 성적 파트너로 상정되는 외모가 뛰어난 백인 여성을 가리키는 인셀의 은어다.
만은 “인셀은 자신이 스테이시라 부르는 이들과 섹스할 권리가 있으며, 그런 권리를 박탈당해왔다고 믿는다”고 했다. 만은 인셀의 우스꽝스러움과 장광설을 개인의 문제로 봐선 안 된다고 본다.
“폭넓고 뿌리 깊은 문화적 현상의 징후”이자 “타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애정과 존경을 담아 우러러보길 기대하는 남성들이 가진 유해한 특권의식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나 성차별, 성폭력은 사회구조 문제다. 한 예로 미국 전역에서 대략 40만건의 강간 키트(법의학적 증거를 모으기 위한 도구 세트)가 분석되지 않았다. 이 사례의 피해자 중 86%가 유색인 여성이다. 만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여성의 키트는 검사된 뒤 사건이 해결되고, 흑인·트랜스젠더·장애인 여성들의 강간 키트는 분석될 가치조차 없다고 여겨지는 구조적 현실을 지적한다.
강간을 두고도 “특정 남성이 특정 여성에게 섹스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악한 행위자들은 남성 가해자를 감싸는 사회구조 덕분에 강간을 실행에 옮길 수 있고, 그 구조 내에서 보호받는다. 그 구조가 이들을 부추기기도 한다”고 했다. 강간범은 구속 전 평균 7~11회의 범행을 저지른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경찰은 ‘예외적 허가’로 강간 사건을 종결하곤 한다. ‘예외적 허가’는 구속할 근거가 충분하지만 이미 감옥에 있거나 사망한 경우 적용하는 규정이다. 만은 강간 사건에서 경찰은 피해자가 기소 의지를 드러내도, 강간 키트에서 피해자 주장과 일치하는 결과가 나와도 ‘예외적 허가’를 적용하는 사례를 구조 문제로 지적했다.
만은 성폭력을 저지르는 개별 행위자보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회구조를 탐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은 데이트폭력과 동의, 낙태금지법, 가사노동, 맨스플레이과 가스라이팅, 여성과 권력에 관한 주제를 실제 사례로 10장에 걸쳐 풀어간다. 마지막 장은 ‘다음 새대의 여성들을 위하여’다. 만은 자신의 딸에게 바라는 것들로 대안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만은 “내 딸이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명확이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때 자기 주장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한다”고 했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비교적 넉넉한 중산층에, 시스젠더이자 이성애를 지향하며, 별달리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백인 여자아이”란 ‘특권’을 딸이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딸에게) 여러 주변화와 억압(딸은 면제되어 있는 조건)에 노출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지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은 구체적 사례를 들어 이렇게 말한다. “딸은 우리 사회에서 흑인과 유색인의 신체를 법제적·초법적으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일에 참여해서도, 용인해서도 안 될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전 세대의 백인 여성들이 해온 것처럼 유색인 여성들의 감정노동과 물질노동을 착취해선 안 될 의무가 있다.”
북미 사례를 다룬 책이지만 한국 현실과 떼어두고 볼 수 없다. 박원순·안희정 등 한국의 미투 사건에서도 ‘좋은 남자’ 포장과 함께 힘패시, 피해자 지우기·비난하기가 나타났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23일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끝나지 않는 피해자의 시간’이란 제목의 성명을 내고 만의 책과 힘패시 등 개념을 인용하며 “가해자에게 공감·감정이입하여 피해자를 공격하는 행위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가해자에게 공감·감정이입하여 피해자를 공격하는 행위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피해자의 피해경험과 피해 말하기를 전면적으로 지우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했다.
김은주, 손희정이 추천사를 통해 각각 ‘집게 손 모양’에 대한 금기, 안산 선수에 대한 쇼트커트 온라인 괴롭힘을 거론했다.
만은 ‘한국의 독자들에게’에서 지난 1월 임신 중인 여성들에게 남편을 위해 밑반찬을 준비하라 등을 적은 서울시 임신·출산 정보센터의 권고 목록을 가부장제적인 규범과 기대치를 적용·강제·강화하는 여성혐오 사례로 들었다. 이어 “여성혐오는 남성은 특권을 누리는 반면 여성은 박탈을 경험하는 사회구조를 작동시키고, 성차별은 그런 사회구조를 정당화한다”며 “이러한 구조 내에서 남성들은 섹스와 같은 재화는 물론, 더욱 교모하게는 여성들의 사랑과 존경, 애정, 돌봄과 노동 같은 재화까지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간주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