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정(吳以井)’ 하면 아마 금방 떠오르지 않는 인물일 테지만, 명옥헌 하면 ‘아하, 그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는 정자!’ 하고 바로 알아채는 분들이 많으리라. 명옥헌 하면 배롱나무, 배롱나무 하면 명옥헌이다. 그만큼 명옥헌은 배롱나무와 짝을 이룬 대표적인 여름 원림이라 할 만하다. 이쯤 되면 배롱나무가 명옥헌의 주인인 듯하여 정작 진짜 주인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명옥헌을 조성한 사람이 바로 오이정이다. 광해군 때 낙향하여 담양 고서면 목맥산 기슭에 조촐한 서재를 짓고 살던 아버지 오희도가 세상을 뜨자, 아들 오이정이 그 자리에 명옥헌을 지었다.
전통 원림은 호남과 영남지역에 많다. 명옥헌은 호남의 명원 중 하나다. 배롱나무는 옛 선비들이 즐겨 찾던 나무인지라 명옥헌 인근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등의 원림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배롱나무를 한자로 자미화라고 하는데, 원림 주변을 흐르는 창계천을 자미탄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명옥헌은 정자와 계류, 연못과 배롱나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멀리서 연못과 배롱나무를 바라보는 풍경도 멋지지만, 연못 안쪽의 정자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와 연못에 비친 배롱나무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이렇듯 안과 밖에서 두루 운치 있는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도 흔치 않을 것이다. 명승 제58호로 지정된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연못의 좌우로 도열한 배롱나무들이 무더위에 지친 나그네에게 ‘어서 오시라’ 하며 팔 벌려 맞이하는 듯하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과 궂은 장마에는 식물도 힘이 드는지 선뜻 나서는 꽃들이 없다. ‘날 좀 보소’ 하며 앞다투어 꽃을 피우는 봄철과는 사뭇 다르다. 무더위를 이겨내며 피는 배롱나무가 그래서 더욱더 반갑다. 게다가 화사한 붉은색 꽃이 거의 백일 동안이나 피어 있으니, 그 근기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면 백일잔치를 하는 것처럼, 배롱나무는 백일상(百日床)을 받을 만한 꽃나무다.
만약 흰 꽃이 피는 흰배롱나무를 심었다면 명옥헌의 풍광은 어떠했을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이 배롱나무를 심은 사람이 궁금하다. 오이정이 명옥헌을 세웠으니 그가 심었거나 나중에 후손들이 심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근거가 될 만한 옛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배롱나무는 흔히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백일홍은 풀이고 배롱나무는 나무이니 엄연히 가문이 다르다. 목백일홍이라는 별칭도 있지만, 배롱나무가 식물학적 표준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