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기만의 집’을 지은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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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학교 인근 담벼락에 원룸과 하숙집 전단이 가득 붙어있다. 이석우 기자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기만의 집’을 지은 여자들

입력 2021.09.02 10:20

수정 2021.09.0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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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정부가 호텔을 개조해 청년주택을 내놓겠다 하니 그 구체를 살피기도 전에 대뜸 “호텔 거지” 운운하던 일각의 비난을 기억한다. 부엌 없는 1인 가구 공간이란 이유만으로 황급히 소환된 “거지”란 멸칭이 보여주듯, 홀로 사는 ‘청년의 집’은 계급과 세대 불평등을 드러내는 빈곤의 문제로 ‘자동 치환’돼왔다. 비좁은 원룸 혹은 열악한 고시원, 그 속을 채운 우울과 불안으로 그려지는 ‘청년의 집’은 아버지 세대의 집이 주는 평온과 안락에서 배제된 가난한 세대 혹은 계급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2019년 2월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학교 인근 담벼락에 원룸과 하숙집 전단이 가득 붙어있다. 이석우 기자

2019년 2월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학교 인근 담벼락에 원룸과 하숙집 전단이 가득 붙어있다. 이석우 기자

청년의 표상에서 오랫동안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의 존재에 주목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성 청년들에게 ‘청년의 집’은 그저 빈곤의 공간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여성 청년들에게 홀로 사는 집은 남성적 장소인 ‘아버지의 집’에서 탈출해 비로소 찾아낸 ‘해방과 자유의 공간’으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동시에 관음적 응시와 성범죄 위험을 내포한 또 다른 억압의 공간이면서, 한편으로는 친구와 연인, 미디어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만의 서사를 기입해가는 주체적 장소가 된다.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
장민지 지음 | 서해문집 | 284쪽 | 1만8000원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는 대학 진학, 구직을 위해 가족을 떠나 이주한 저자가 비슷한 경험을 가진 19~34세 여성 청년 12명과 인터뷰해 풀어낸 젠더적 관점의 ‘청년의 집’ 이야기다. 청년이지만 청년으로 호명되지 못했던 여성 청년들의 ‘자기만의 집’이 책을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가족과 살기 싫”어서 “공부를 해서 서울로 가”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었던, 이주를 겪은 여성 청년 누구나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기존 청년 담론의 공백을 가득 채운다.

여성 청년들에게 ‘청년의 집’은 그저 빈곤의 공간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여성 청년들에게 홀로 사는 집은 남성적 장소인 ‘아버지의 집’에서 탈출해 비로소 찾아낸 ‘해방과 자유의 공간’으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인터뷰 참여자가 직접 그린 자신의 집 이미지 | 서해문집 제공

여성 청년들에게 ‘청년의 집’은 그저 빈곤의 공간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여성 청년들에게 홀로 사는 집은 남성적 장소인 ‘아버지의 집’에서 탈출해 비로소 찾아낸 ‘해방과 자유의 공간’으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인터뷰 참여자가 직접 그린 자신의 집 이미지 | 서해문집 제공

예컨대 혜령(이하 가명)은 자신의 수도권 이주가 “남아 선호가 강했던 가족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고 말한다. 물리적 건축물뿐 아니라 가족 간 감정적 교류까지 포함하는 전통적 개념으로서의 ‘집’은 이성애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내재할 수밖에 없다. “남성은 공적 공간의 삶을, 여성은 사적 영역의 삶을 담당하는 이성애 중심적 가족 제도는 젠더 역할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가족 생활을 통해 자녀에게 지속적으로 각인”된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대부분의 여성에게 이주란 결혼을 통해 또 다른 집에 둥지를 트는 것 혹은 가족 부양을 위해 공장 노동자 등이 되는 것에 불과했다. 혜령의 ‘탈주’는 “사적 영역의 삶”에 복속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 여성들에게는 불가능한 서사였다.

그런가하면 지현은 “어렸을 때부터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가 되게 센 사람”이었던 터라 어린 시절 “무조건 서울로 간다는 주의”였다고 회상한다. 저자는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문화적·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여성들의 열망을 신자유주의적 ‘자기 성장’의 기대감으로 해석한다. “사적 공간이자 남성 중심적 장소인 집에서는 전형적 여성성을 강요받지만, 공적 공간에서는 젠더 이분법에서 벗어나 발전해야 하는 주체로 호명되는” 이중적인 요구 속에서 여성 청년들은 ‘탈주’이자 ‘성장’으로서 수도권으로의 이주를 감행하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기만의 집’을 지은 여자들[플랫]

그렇게 확보한 여성 청년들의 ‘집’은 사회적으로 강요받던 ‘여성’ 그리고 ‘여성 노동’의 전형성을 전복하는 해방의 공간이 된다. 여성 청년들은 혼자 사는 집에서, 늦게 귀가하거나 술을 마시고 가사 노동을 게을리하며 원하는 성별의 연인과 자유롭게 관계를 맺는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금기시되던 행위들을 통해 가부장적 불문율과 관습을 어기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제 ‘집’은 전통적인 의미처럼 안정감, 친밀감으로만 가득하지도 ‘청년의 집’에 기대되는 계급적 해석처럼 빈곤으로만 점철돼 있지도 않다. 여성 청년들은 친구, 연인, 반려동물과 주체적인 형태의 유사가족을 만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미디어를 통해 관계 맺기의 범위를 확장하면서 ‘집’에 대한 자기만의 서사를 써내려간다. 비록 공간이 비좁고 열악하고 불안정하더라도, 여성 청년들에게 이곳은 고유한 서사가 담긴 명백한 ‘자기만의 집’이 된다.

오직 해방의 서사만 깃드는 것은 아니다.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여성 억압적 시선으로부터 이들의 ‘집’ 역시 자유로울 순 없다. 현민은 “혼자 사는 여자 인기 최고지”라는 성희롱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다른 인터뷰 참여자들 역시 ‘혼자 사는 여성’을 “남성들의 성적 대상이자 임시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상상된 몸”으로 간주하는 시선을 경험했다고 토로한다. 막연한 침입과 범죄의 두려움에 시달리면서도 ‘예민’하거나 ‘히스테리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검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가부장적 시선을 피해 도시로 이주”했지만 “여성의 몸을 위협하는 사회적 시선”은 거대한 구조를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혜 기자 kimg@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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