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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만든 말 ‘천고마비’

입력 2021.09.06 03:00

수정 2021.09.0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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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열기도 많이 수그러졌다. 이제 가을이다. 이 무렵이면 흔히 쓰는 말이 있다. ‘천고마비(天高馬肥)’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으로, 한가하고 풍요로운 가을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말의 원뜻은 섬뜩하다. <한서(漢書)>에 나오는 이 말은 ‘북방의 흉노족이 키운 말들이 잔뜩 살쪘으니, 이제 곧 그들이 쳐들어와 식량과 가축을 노략질해 갈 것’이라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시성(詩聖) 두보의 종조부인 두심언이 북쪽 변방을 지키러 나간 친구 소미도에게 보낸 편지에도 ‘추심새마비(秋深塞馬肥)’라는 구절이 있다. “가을이 깊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라는 뜻으로, 이 또한 흉노족의 침입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즉 ‘천고마비’는 ‘하늘이 맑고 모든 것이 풍성하다’라는 낭만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위험한 계절’이라는 무서운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속뜻은 사라지고 글자의 의미만 남아 가을의 풍요로움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이렇듯 세월 속에서 변하는 것은 강산만이 아니다. 말도 변한다.

이맘때면 가을의 넉넉함을 뜻하는 말로 ‘오곡백화(五穀百花)’도 적잖이 쓰인다. 하지만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바른말이 아니다. 시인 윤동주가 생전에 즐겨 불렀다는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나를 보내주오’에도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오/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다. 살아생전 줄곧 타관을 떠돈 식민지 청년은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고달픔과 서러움 그리고 조국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을 것이다. 이 노래는 예전에 중·고교 음악책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오곡백화’라고 하면 ‘다섯 가지 곡식과 100가지 꽃’이다. 뜬금없는 꽃 타령이 생뚱맞다. 꽃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고, 누구도 ‘꽃이 익어 간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지금 우리 들녘에서 익어 가는 것은 ‘오곡백화’가 아니라 ‘오곡백과(五穀百果)’다. 이때 ‘오곡’은 모든 곡식을, ‘백과’는 갖가지 과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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