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국밥을 좋아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아주 어림없는 소리는 아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어떤 음식에 대한 기억은 유독 선명하다. 날씨와 분위기까지, 그때로 돌아간 듯 되살릴 수 있다.
그날도 이런 검고 무거운 그릇을 보았다. 사진은 독립문 인근에서 유명한 도가니탕집. 여길 가면 언제나 내가 제일 어리다. 금귤섬의알로하
엄마는 세 살 어린 동생은 집에 두고 나만 데리고 외출하는 날이 많았다.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직 떡꼬치에 통닭의 양념 대신 케첩을 발라 먹었던 것으로 추측해보면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양념 통닭을 먹을 수 있도록 처음 허락을 받은 것이 일곱 살 때였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찬 바람을 피해 천호동 구 사거리 인근 음식점에 들어갔다. 엄마가 뭔가를 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검고 무거운 그릇에 펄펄 끓는 뽀얀 국물이 담겨 나왔다. 동생도 함께 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엄마는 나와 식당에 가면 한 가지 메뉴를 시켜 자신 몫을 나눠줬었다. 음식을 덜어주며 “뜨거우니 조심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맛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하지만 창가에 마주 앉아 엄마가 덜어준 음식을 조용히 다 먹은 후에 플라스틱 접시를 내려다보며 했던 말은 선명하다.
“엄마, 이거 뭐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식의 ‘이름’을 물어본 기억이다. 내게 ‘미각’이라는 세계를 열어준 음식이 바로 순대국밥이다.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국밥을 좋아했다’는 말이 아주 어림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가 국밥을 좋아한다”라며 별스럽게 보는 시선을 느꼈던 시절을 지나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국밥을 좋아한다. 나에게 ‘클래식’인 순대국밥, 당면을 넣어 먹으면 맛있는 맑은 갈비탕, 소면이 들어가는 뽀얀 설렁탕, 무가 들어가는 빨간 경상도식 장터국밥, 전문점이 없어 좋아해도 자주 먹지 못하는 도가니탕도 있다. 나에겐 ‘스지국’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가게’가 있었던 소머리 국밥, 새우젓으로 슴슴한 맛을 맞출 수 있는 콩나물국밥, 속이 시원해지는 굴국밥…. 곰탕과 뼈 해장국, 돼지국밥, 육개장 등 좋아하는 국밥에는 경계가 없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 나오는 ‘국밥’을 좋아하는 것이지 ‘국’과 ‘밥’이 포함된 식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국’과 ‘국밥’은 다르다.
교복을 입은 우리는 뜨거운 순댓국을 ‘후루룩’ 먹어치우곤 했다. 금귤섬의알로하
국밥의 기억에는 함께 먹었던 사람들도 남아있다. “순댓국 먹을래”라는 말에 군말 없이 하굣길에 함께 순댓국집에 들렀던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15년 넘게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첫 만남에 국밥을 먹었던 친구는 가장 속 깊은 이야기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가 어색했던 대학교 신입의 봄 날, 식사 메뉴를 고민하던 낯선 친구와 ‘소머리 국밥’ 간판을 발견하자마자 두 눈이 마주치며 서로 오랜 인연이 될 것을 알아 봤다.
국밥은 선뜻 먼저 식사 메뉴로 제안하기 어려운 음식이다. 상대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서고 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오랫동안 ‘커리어 우먼은 홀로 국밥 따윈 먹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지고 살았다. ‘국밥 사주는 선배’ 말고 ‘파스타 사 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얄팍한 자아도 남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좋아했다고 한 주제에, 나는 남들 앞에서는 국밥을 부끄러워한다.
가끔은 숨어서 먹는 기분으로 국밥을 찾지만 나쁘지는 않다. 어쩌면 혼자 먹을 때 가장 편하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혼밥’이 남사스런 성격도 아니다. 맛있는 건 혼자 먹어도 맛있다. ‘후후’, 광화문·서대문·시청 근처에서 홀로 국밥에 입김을 불며 먹는 사람이 있다면 나일 지도.
금귤섬의알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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