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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라는 이유로 숨어야 하나요”···서울 거주 소수자 3명 중 1명 “정체성 표현 못해”

김태희 기자
성소수자 차별 금지를 표현한 무지개길. 출처 pixabay

성소수자 차별 금지를 표현한 무지개길. 출처 pixabay

# 성소수자 A씨는 대학 때 만난 20년지기 친구에게도 자신이 성소수자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가장 친한 사이지만 그 친구가 평소 성소수자에 대해 해온 발언들을 봤을 때 친구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꾸미기를 좋아해 직장 동료로부터 “너 게이냐”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듣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생각은 없다. A씨는 “직장문화가 폐쇄적인 곳이기도 하고,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아도 간접적인 차별을 받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A씨는 자신의 대학, 직장과 접점이 가장 적은 극소수의 지인에게만 자신의 정체성을 털어놓았다. A씨는 부모님께도 정체성을 밝힌 적이 없다. 대외적으로 그는 ‘비혼주의’다.

#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 B씨는 무슬림이지만 교회를 다닌다. 그가 다니는 회사 사장이 ‘너 무슬림이냐’라고 물었을 때 무슬림이 맞다고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장은 평소부터 무슬림에 대해 차별적인 발언들을 해왔다. 이후 사장이 “교회에 같이 가자. 무슬림이 아니면 상관 없지 않냐”고 말했을 때 B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B씨는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차별을 받을 것만 같았다”고 했다.

A씨나 B씨처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로서 ‘소수자’에 속하는 서울시민 3명 중 1명은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사회의 부정적 시선이나 불이익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또 서울시민 80%는 다른 문화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소수자가 이웃이 되는 등 자신의 일이 될 경우는 3명 중 1명만 동의하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서울연구원은 지난해 6월 서울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서울시 문화다양성 시민인식지표 개발과 정책과제’ 보고서를 발표했다. 12일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의 21.2%는 종교와 가치관, 행동양식 등에서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한 자신만의 ‘비주류 문화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비주류 문화의 표현도. 서울연구원 제공

비주류 문화의 표현도. 서울연구원 제공

비주류 문화표현이 있다고 한 응답자 가운데 21.7%는 자신을 사회적 소수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문화와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이들은 3분의 1에 달했다. 34.8%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고 답했고, 30.4%는 ‘보통이다’, 34.8%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답했다.

정체성을 숨기게 된 이유로는 28.2%가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22.1%는 ‘표현을 했다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 12.7%는 ‘같이 어울릴 사람이 없음’, 12.4%는 ‘가족과 지인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이라고 생각’ 등을 선택했다. ‘표현하는 데 어려운 점이 없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은 3.2%에 그쳤다.

비주류 문화를 표현하는데 느끼는 어려운 점 순위. 서울연구원 제공

비주류 문화를 표현하는데 느끼는 어려운 점 순위. 서울연구원 제공

소수자들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 제도적 환경 탓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는 “이주노동자나 성소수자 등 소수자들은 이미 고용허가제나 이분법적인 성별 규정 등 제도적으로 고착화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면서 “차별이 전제된 상황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보고서에는 시민들의 문화다양성 수용에 대한 인식과 실제 소수자에 대한 수용도 사이의 괴리도 나타났다. 응답자의 79.5%는 다른 문화를 차별해선 안된다고 답했으며, 69.4%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문화적 배경별로 구체화해 이뤄진 질문에서는 수용도가 이보다 낮게 나타냈다. ‘성적지향·성정체성’에 대해 ‘존중한다’고 답한 비율은 47.1%에 그쳤다. ‘종교·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53.3%, ‘출신 지역’은 60.2%, ‘비주류 문화예술 취향’은 60.7%가 ‘존중한다’고 답했다.

서울시민의 다른 문화적 배경에 대한 존중도. 서울연구원 제공

서울시민의 다른 문화적 배경에 대한 존중도. 서울연구원 제공

특히 소수자와 지내는 것이 ‘내 일이 된다’고 가정했을 때 서울시민들은 한층 더 배타적인 모습을 보였다. 응답자 중 34.2%만 성소수자와 ‘이웃이 되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고 답했다. 28.9%는 성소수자와 이웃이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이주노동자와 북한이탈주민에 대해서도 각각 44.5%, 45.4%만이 이웃이 되는 것에 ‘동의한다’고 답했고, 14.8%와 16.8%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열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제도·정책적 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안 활동가는 “사회적 시선을 바꾸기 이전에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며 “차별금지법 등 차별 금지를 제도화하는 조치가 선행돼야 사람들의 인식 변화도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이 이웃이 되는 것에 대한 동의도. 서울연구원 제공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이 이웃이 되는 것에 대한 동의도. 서울연구원 제공

백선혜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회가 점차 다분화되고 있으며 이제는 어느 누구도 소수성을 가질 수 있다”며 “소수성 자체를 특정하는 것보다 다른 문화 표현에 대해 존중하고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문화 표현을 존중하고 공존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정책적 지원책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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