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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이낙연, 이별에 대한 예의

입력 2021.09.16 20:23

수정 2021.09.2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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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갈수록 시시하게 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곱씹게 된다. 청춘 시절에야 앞날이 불투명하고, 세월의 풍상을 쌓지 못했으니 용기와 열정만으로도 자신만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용감했음에도, 뜨거웠음에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고 심지어 길을 잃고 헤매는 때가 잦아진다. 꿈보다 일상이 더 간절해지면 모든 순간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그러니 시시해질 수밖에. ‘어른’이 되는, 성찰의 과정이다. 정치의 세계는 다르다. 선수가 쌓일수록 욕심이 커진다. 대선 승리 이후 혹시 나를 내각에 중용하지 않을까 싶어 몇 날 며칠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선출직에 나선 후보들은 저마다 당선을 확신한다. 3선만 넘어도 대통령 꿈을 마음에 담아둔다. 정치인의 인생은 시시해지기가 이토록 힘들다. 내려놓고 길을 터주는, 정치 ‘어른’의 부재가 지속되는 까닭이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구혜영 정치에디터

대선 경선이 한창인 더불어민주당에서 두 번의 고별사가 나왔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이낙연 전 대표다. 정 전 총리는 경선 레이스에서 물러났고 이 전 대표는 국회의원직을 버렸다. 두 사람은 다선 중진에, 국무총리와 대표를 거친 거물 정치인이다. 무엇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자장 안에서 성장했다. 정 전 총리는 15대 국회, 이 전 대표는 16대 국회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이 무렵 DJ는 민주당의 전통적 기반인 동교동·재야 그룹만으로는 정권 교체가 어렵다고 판단, 각 분야 전문가들과 테크노크라트를 대거 영입했다. 국가 ‘경영’의 관점을 중시한 실용적 스탠스였다. 정 전 총리와 천(정배)·신(기남)·정(동영), 추미애, 김한길 등이 대표적이다. 전문성 있는 엘리트 중심의 국가 운영을 염두에 뒀던 인재풀이라 정치력보다 정책 생산에 중점을 뒀다. 선배 그룹인 재야·동교동 세력과 후배 그룹인 86세대에 치여 그들만의 정치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도 역부족이었다. 굳이 말하면 ‘일꾼 세대’였다. 실제 당이 위기일 때 호출되는 등 주로 구원투수 역할을 맡았고, 양극화된 진영 정치 속에서 두꺼운 팬덤조차 없는 환경도 이들이 정치 지도자로 성장하지 못한 배경이었다. 정 전 총리를 향한 오랜 질문인 ‘저 스펙과 저 이력에 왜 뜨지 못할까’의 답일 수 있겠다. 이 전 대표도 DJ가 발탁한 ‘일꾼 세대’의 막차를 탄 인물이다. 비록 발군의 스타는 없었지만 ‘일꾼 세대’는 20년 넘게 민주당 정치를 풍미했다.

정 전 총리와 이 전 대표는 이번 대선에서 각각 다른 이유로 ‘정치’와 이별을 했다. 정 전 총리는 “시대가 나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며 물러날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의 퇴장은 경선 레이스에서 4위로 밀려난 이유도 있겠지만 구차한 변명은 없었다. ‘시대가 원하지 않는’다는 말속에 성찰을 담았다. 고별사에서도 ‘백의종군’ ‘국민과 당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말했다. 6선 정치인, 당대표, 국무총리, 장관직 등 화려했던 자리가 결코 혼자의 것이 아니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 전 대표는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한다고 했다. 의원직을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도 했다. 잠시 말문을 잃었다. 헤겔이 말한 역사의 간계가 이런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민주주의 가치와 국회의원직 사퇴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주권자의 수탁인이자 대리인인 국회의원이 개인 소유물인지, 기득권을 희생하는 개념인지 묻고 싶었다. 또 “민주당 후보가 도덕적이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라고 이재명 후보를 우회 비판했다. 왜 이런 후보를 1위로 만들어 놓았냐고 주권자들을 혼내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지역구 국회의원 사퇴 회견을 광주에서 했다. 최고 권력 자리를 위해 지역주의에 기댔다는 비판이 나올 법하다. 안 그래도 국회의원직 사퇴가 유행처럼 번지고, 국회의장에게 욕을 하고, 일만 터지면 사법부에 기대는 등 의회 정치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국무총리, 도지사까지 역임한 5선 당대표 출신 정치인이 ‘대통령 권력’을 좇느라 의회 권위를 무너뜨릴 줄이야.

이번 대선이 ‘일꾼 세대’들의 마지막 무대 일지, 새로운 기회 일지 확실하진 않다. 그러나 오랜 시간 정치와 사랑을 주고받았던 정치인일수록 수모와 고통이 뒤섞인 순간에도 지난 시간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설령 그 순간이 이별일지라도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처음엔 서먹서먹하게 다가섰지만 어렵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건네준 주권자들이 왜 이제 와서 별것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물러선다는 건, 내가 시시해 질 수 있다는 성찰의 결과다. 정치의 ‘어른’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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