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가 재난긴급생활비를 다문화가정에 지급하면서, 자녀가 있으면 이주민 배우자에게도 주고 자녀가 없으면 배우자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일이 있었다. 자녀가 없으면 이주여성도 없는 사람 취급이다. 차별로 지목되자 지자체는 규정에 따랐을 뿐이라는 궁색한 핑계를 댔다.
“손발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같은 말은 차별로 쉽게 지적된다. 그러나 실언을 낳는 차별의 실재는 그대로 남는다. 서울의 많은 지자체에서 이주여성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출산다문화팀’이다. 이주여성 하면 결혼과 출산, 외국인노동자 하면 육체노동을 떠올리게끔 제도가 특정한 정체성을 특정한 위치로 배치한다. 세계가 이러하므로, 차별은 일부러 하기가 더 어렵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에서 통번역사로 일하는 이주여성들이 있다. 이주여성에게 한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한국의 가족이나 직장, 공공기관에 이주여성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센터에서 일하는 선주민 직원과 달리 10년을 일해도 경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임금은 최저임금을 겨우 웃돌고 여러 명목의 수당에서도 배제됐다. 이주여성들이 임금차별에 항의하며 행진을 했다. 언론을 통해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가 해명을 했다. 센터의 행정직원은 호봉제 체계이고 통번역사는 직무급제라서 생기는 차이일 뿐 출신국가를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주여성이 맡는 통번역사 일만 직무급제로 두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시민들의 편견이나 태도에 있다고 짚는 정치인들도 있다. 편견을 낳는 차별의 제도와 규정과 관행은 그대로 두고 시민 탓이다. 다들 문제라고 하는 성별임금격차도 여성을 차별할 의도로 만들어진 현상이 아니다. 차별이 차별이 아니라는 핑계들이 일의 세계에 켜켜이 쌓여 굳어진 구조다. 업무적합도의 문제라거나 사회적 역할을 고려한다거나 임금체계가 달라서라거나, 여러 핑계로 포장된 칸막이가 삶의 상한선이 된다. 누군가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칸막이가 보인다. 방송사가 남성 아나운서는 정규직, 여성 아나운서는 비정규직으로 뽑고 있었어. 공장에서 남성과 여성의 업무를 분리해 등급을 다르게 매기니 임금이 이렇게 차이 났던 거야. 보이기 시작하면 바꿀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앞서 싸운 사람들이 벼린 차별의 개념과 언어에 기대어 다음 사람들이 싸울 수 있게 하는 법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이 국회에 전달된 지 100일이 넘었다. 법이 정한 90일의 기간 동안 심사도 시작하지 않은 법제사법위원회는 11월10일까지 심사를 연장한다고 심드렁하게 통지했다.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하고 차별은 차별이므로 금지하자는 법이 국회 문턱에 걸린 지 14년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는 핑계가 차별하게 해달라는 주장을 거들 뿐임을 알 때도 됐는데, 10만명의 시민이 문턱을 넘겨 넣어주어도 국회는 딴청만 피우고 있다. 차별의 칸막이를 그대로 두고 정권 재창출이냐 교체냐를 따지는 것은 누구를 위한 다툼일까.
한국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이종걸 활동가와 나는 11월10일까지 걷기로 했다. 부산에서 서울 국회 앞까지 100만보를 내딛는다. 30일 동안 걸을 생각을 하니 걷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조금 두렵지만, 이주여성이 걸었듯 차별에 맞서 먼저 싸운 이들이 내온 길을 끊어지게 두고 싶지 않다. 길을 내는 일은 못해도 누군가 낸 길을 잇는 일은 할 수 있겠지. 국회의 응답 대신 부고를 들어야 하는 시간은 이제 끝내야 하지 않겠나. 혹시 당신도 같은 마음이라면,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걸어달라 부탁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향해 평등길을 이어달라 제안한다. #평등길1110. 길이 이어질수록 길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