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호
권윤덕 글·그림 | 사계절 | 52쪽 | 1만7000원
<용맹호>의 주인공 용맹호는 수시로 베트남전 참전 당시의 풍경으로 소환된다. 그의 트라우마는 신체의 기괴한 변형으로 표현된다. | 사계절 제공
의인화된 호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책이다. 용맹호라는 이름의 호랑이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며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분주히 움직이는 한여름의 도시 풍경이 싱그럽다.
그림체는 끝까지 유지되지만 내용은 조금씩 심각해진다. 용맹호의 과거가 드러나면서부터다. 미취학 아동도 볼 수 있도록 텍스트가 적고 그림이 많지만, 주제는 한없이 무겁다.
용맹호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자동차 정비소에 출근해 일곱 대의 차를 수리한 후 노을을 짊어지고 돌아오는 삶을 반복한다. 용맹호의 나이는 중년으로 보이지만 평소 체력을 잘 관리했는지 꽤 튼튼해 보인다. 용맹호는 버스 정류장에서 검정 옷을 입은 엄마와 안긴 아기를 본 뒤 갑자기 숨이 막힌다. 날씨가 더워서일까. 독자는 이유를 아직 알지 못한다.
용맹호는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왕지네가 발밑으로 기어가는 듯, 거머리가 나무에서 흔들거리는 듯한 느낌에 자꾸만 잠을 깬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화분에 물을 주고 빨래를 널고 아령을 들며 운동한다. 다만 밤 사이 귀가 하나 더 늘어 세 개가 됐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용맹호는 정비소 사장님이 늘어난 귀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신경쓴다.
용맹호의 몸에는 조금씩 이상 증상이 늘어난다. 갑자기 AK 소총 소리의 환청을 듣는가 하면, 여성의 검은 옷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악몽을 꾼다. 눈이 하나 더 생겨서 베트남 꾸이년의 바닷가 파란 물결이 보이기도 한다. 분홍색 살점이 생겨 온몸에 덕지덕지 들러붙는다. 환각에 시달리며 균형감각을 잃은 용맹호는 수시로 넘어지는데, 그때마다 베트남의 농가와 민간인들이 떠오른다. 결국 길에서 실신한 용맹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응급조치를 하는 장면으로 그림책은 끝난다.
용맹호는 월남전 참전 군인으로 보인다. 성실하게 일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아무일 없는 듯 살아가지만, 그때의 트라우마는 용맹호를 여전히 잠식하고 있다. 용맹호를 더욱 괴롭히는 건 단지 그가 참전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에 연루됐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마음의 괴로움은 귀, 가슴, 살점이 늘어나는 몸의 이상증상으로 나타난다. 자동차 밑에서 정비를 하다가도 용맹호는 순식간에 베트남의 정글로 돌아간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용맹호가 당시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날 길은 없어 보인다.
용맹호의 트라우마는 복잡한 문제다. 국가에 동원돼 자신과 무관한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웠다는 점에서는 피해자이지만, 민간인 학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는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자칫 사건의 본질을 흐릴 위험이 있다.
권윤덕 작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2010년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그린 <꽃할머니>를 펴냈던 권 작가는 베트남의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며 <용맹호>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는 “피해자와 함께하는 일은 커다란 아픔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게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고 인권을 주창하는 위치여서 마음의 짐은 무겁지 않았다”며 “가해자와 한편에 있다는 죄책감은 ‘우리 나라’ ‘우리 사회’ ‘나’로 연결되면서 큰 무게로 내 어깨를 짓눌렀다”고 말했다. 작업을 하다가 미루기를 반복하며 <용맹호> 출간에 10년이 걸린 이유다.
권 작가는 용맹호가 ‘착한 참전 군인’으로 보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묘사하면 “가해자도 피해자다”라는 ‘물타기 논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용맹호의 가해 행위와 그 잔혹함을 있는 그대로 그린 이유다.
권 작가는 괴물이 된 채 결국 쓰러지고 마는 용맹호의 모습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가해성을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 가해자를 연민하자는 뜻이 아니라, 가해자의 비참한 말로, 가해자를 둘러싼 사회구조까지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용맹호는 밤에도 좀처럼 편히 잠들지 못한다. | 사계절 제공
<용맹호> 표지 | 사계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