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이리저리 검사를 받았더니 6개월 후 죽을 것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송곳니 쪽이 좀 거북하여 치과에 갔다가 입안을 사진과 거울로 몇 번 털리고 났더니 무려 600만원의 견적이 나왔다. 사무실의 가벽을 헐어 공간을 넓히려고 아는 분의 소개로 업체를 불렀더니 예상 액수의 세 배를 부른다. 무시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아니지만 그대로 따르자니 황당하다. 이럴 때 우리는 다른 병원 다른 의사를 찾아 검진을 받으며, 다른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며, 다른 업체를 불러 견적을 내어 본다. 이를 ‘두 번째 의견’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의견’을 찾게 되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들고 갖은 어려움을 꾹 참아가며 그들이 내놓는 처방을 충실히 실천하였건만 장구한 시간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그러한 기존의 처방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 고리의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까지 있다. 따라서 시급하게 ‘두 번째 의견’을 구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번째 의견’이라는 것은,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전혀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째서 평범한 우리보다 해당 분야를 훨씬 잘 아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세 가지 정도의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단순 실수. 검사 장비에서 기술적 오류가 있었다든가 정보와 소통에 착오가 발생했다든가 하는 경우이다. 둘째, ‘사유 습관’. 19세기 미국의 철학자 퍼스는 우리 인간의 사유는 합리성이 아니라 대대로 ‘합리적’이라고 여겨 온 생각의 습관에 따라 지배받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객관적 데이터를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얼마든지 그러한 관습적 사유의 노예가 될 수 있으며, 이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노예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셋째, 그 전문가라는 이들이 유형·무형의 각종 이권과 이득에 암묵적·명시적으로 엮여서 한편이 되어 있는 경우이다. 이는 앞의 두 가지 요인을 더욱 강화하면서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노후된 것이 뻔한 장비나 방법들을 의도적으로 온존시키며, 사람들의 잘못된 통념과 오류를 악이용하고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면 대안은 ‘두 번째 의견’을 한 번 찾아보는 것밖에 없게 된다.
첫 번째 의견이 사회문제와 정책에 있어
현실에 도움 안 되는 건 실로 무궁무진해
사회의 생태적 위기는 폭발적인 악화일로
두 번째 의견은 흥미로 듣는 것이 아니라
때론 생사까지 오가는 건곤일척의 선택에 닥쳐
과감한 상상을 펴나가며 묻는 것이다
몸이나 이빨이나 사무실 가벽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개인적·집단적 행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각종 사회 문제와 사회 정책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사회과학의 발달 수준이 과연 자연과학이나 공학·의학만큼의 정밀성과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보통 사람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들 중 주류에 해당하는 이들이 내놓는 처방과 주장을 설령 아주 황당한 것이라고 해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30년, 40년이 지났다. 아무 차도가 없고 되레 사태는 악화만 되어 간다. 그래도 그 전문가들은 똑같은 처방을 질리지도 않고 몇 십 년째 똑같이 지긋지긋하게 반복한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하염없는 무의미한 기다림이 현대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몇 가지만 생각해 보자.
‘규제완화’도 ‘보편적 복지’도 의문
“경제를 살리는 길은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감세, 균형재정에 있다.” 경제학과에 입학한 이래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들은 이야기다. 이렇게 하면 높은 성장과 투자로 일자리가 생겨날 뿐만 아니라 부자들의 ‘낙수효과’로 소득 불균형까지 개선되어 갈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최대한 살려 나간다면 환경 문제를 포함한 각종 사회 문제들도 다 해법을 찾게 될 것이라는 게(예를 들어 ‘탄소배출권 시장’ 등) 이들의 약속이었다. 이것이 하나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 전 세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뿐만 아니라 경제 관료 및 싱크탱크 그리고 언론인들에다 정치인들까지 한목소리로 이를 외치고 실천해온 지 30년이 넘었다. 2021년의 시점에서 이러한 효과가 실현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심지어 현실이 조금이나마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고 말할 사람도 찾기 힘들다. 저성장과 만성적 대량 실업과 끝을 모르는 불평등의 심화 등은 지금 전 지구적인 일반적 조건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문가들은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감세, 균형재정”이라는 처방전을 똑같이 내밀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는 길은 북한을 적으로 혹은 동포로 간주하여 그에 합당하게 대하는 것이다.” 냉전이 끝난 지난 30년간 대북정책, 나아가 우리의 외교정책 일반이라는 것도 이 두 가지 입장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절충이나 종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완벽한 평행선을 그리는 두 입장이 그저 정권의 교체에 따라 한 번씩 마이크를 쥐면서 냉온탕을 번갈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어느 쪽도 약속했던 바의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민족의 화해와 동북아시아의 안정은커녕 북핵의 대두와 일본의 변모 그리고 유라시아와 인도양-태평양의 지정학적 변화 속에서 한국의 국제적 운명은 미궁 속으로 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2010년대 이후 지난 10년간 특히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보편적 복지’는 거의 절대선이자 지상명령으로 여겨 온 목표였다. 복지는 취약계층만이 아니라 중산층을 포함한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복지의 혜택들을 본 중산층으로 하여금 증세에 동의하게 만들어 복지국가의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게 하며, 이에 강력한 ‘복지동맹’이 형성되어 복지국가의 뿌리가 튼튼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난 일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노인연금, 아동수당, 고운맘 카드 등 여러 ‘보편적’ 복지정책들이 시행되었지만 중산층은 ‘세금 폭탄’을 운운하며 증세를 한사코 거부하고, 이들의 실효세율은 아직도 부끄러울 정도로 낮다. 그 결과 취약계층에게 가야 할 한정된 복지 재정을 중산층이 털어가 버리는 ‘역진적’ 효과가 나오고 있다는 의심이 짙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여전히 ‘보편적 복지’만이 살길이라는 믿음이 지배하고 있다.
사유습관 버리고 변할 각오 다져야
사회 문제와 정책에 있어서 ‘첫 번째 의견’이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는 이 세 가지 말고도 실로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21세기의 5분의 1이 벌써 지난 지금, 우리는 ‘두 번째 의견’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규제완화는 정말로 경제를 살리는가? 감세는 정말로 투자 유발과 ‘낙수효과’를 낳는가? 균형재정은 철칙인가? 북한과의 관계 설정은 적과 동포라는 이분법밖에 없는가? 우리의 외교정책은 여전히 대북정책이라는 틀로 결정되어야 하는가? 모든 통일은 절대선인가?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처럼 나아갈 수는 없는가? 조직 노동이 복지국가와 사회 변화에 별 관심이 없는, 그리고 ‘사회 연대’라는 건 아무나 자기들이 유리할 때만 갖다 쓰는 빈말로 전락한 우리나라에서 교과서에나 나오는 북유럽식의 ‘복지동맹’이라는 게 가당한 전략인가? 1 대 99의 불평등 이상으로 80 대 20의 불평등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보편적 복지’는 만병통치약인가?
이런 의문이 치솟는 것을 꾹꾹 눌러가며 그저 맞는 말이려니 하며 살아온 것이 이미 몇 십 년이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오히려 규모와 범위와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사회적 생태적 위기는 폭발적인 악화일로에 있는 지금이다.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지금 세상에 통용되는 ‘첫 번째 의견’이라는 것이 앞에서 말한 세 번째의 경우, 즉 모종의 이권과 이해관계로 인해 왜곡되고 편향되어 우리의 눈을 의도적으로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해 보아야 한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거의 분명한데도 그냥 목사님, 스님의 설교와 설법처럼 아무도 따져묻지 않은 채 통용되는 명제와 정책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도 우리 뇌주름에 촛농처럼 굳어 있는 ‘사유 습관’을 버리고 과감하고 대담하게 생각과 상상을 펴나가며 변해갈 각오를 해야 한다. ‘두 번째 의견’은 한가한 흥미로 듣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생사까지 오가는 건곤일척의 선택에 닥쳐서 묻는 것이 ‘두 번째 의견’이다.
정치경제학자.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국제칼폴라니 연구협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