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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치한다’는 착각

입력 2021.10.29 03:00

격변의 역사는 저마다의 죄의식을 뿌리내리게 한다. 혁명과 반동이 수시로 반복됐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거인의 어깨가 꺾이고, 나약했던 소시민들이 전면에 나선 경우가 드물지 않다. 민주화운동 서사만 해도 누군가는 액자로 걸어두고 사는가 하면 누군가는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현대사의 질곡은 이념 대립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부채의식)일지 모르겠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구혜영 정치에디터

5월 광주가 대선 정국에 소환됐다. 국민의힘 유력 대선 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전두환 정치’를 소환하면서다. 그는 지난 19일 “군사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만 빼면 정치 잘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5·18정신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반독재 투쟁이라고, 5·18 가치를 헌법정신이라고 말했던 그다. 해마다 5월이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제사를 지내는 광주, 항상 흥건한 피로 젖은 하늘을 이고 살아야 했던 그 도시 광주. 야권 유력 대선 주자가 5월 광주를 ‘전두환 정치’로 호명하면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도 함께 끌려 나왔다.

일각에서는 윤 전 총장의 역사의식 부재를 말한다. 대통령이 되려는 자의 역사의식은 중요하다. 복잡한 이유를 찾을 것도 없이 ‘잘못된 역사’를 만들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68혁명의 톨레랑스 정신을 구현했던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추운 겨울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 꿇었던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사례에서 드러난다. 68혁명 전만 해도 나치 전범들이 정치에 가담했지만 68혁명 이후엔 하나둘 물러났다. 정치 리더들의 역사의식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계승하려는 자의 부채의식도 역사의식이다. 윤 전 총장의 ‘전두환 정치’는 이런 측면에서 보면 명백한 역사의식 부재가 맞다.

지지층 결집을 위한 선거 전략이라는 말도 들린다. 윤 전 총장은 부산에서 이 발언을 했다. 한술 더 떠 “호남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말(전두환 정치 잘했다)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윤 전 총장 측 하태경 의원은 아예 “계란을 맞는 한이 있어도 (윤 전 총장이) 광주에 가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지층 결집 전략이라기엔 허술하다. 보수의 수준은 이준석 대표를 세울 정도다. 태극기부대가 밀려났다고 생각될 만큼 수구세력은 다수가 아니다. 혹자는 지역감정 자극 전략이라며 제2의 초원복집 사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초원복집 사건은 공권력이 선거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불법도청으로 폭로했다가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감정을 유발한 것으로 변질된 사건이다. 부산은 6월항쟁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이다. ‘전두환 정치’ 옹호로 지역감정을 유발하려는 시도는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 전 총장 발언은 부산 시민들은 물론, 호남민들까지 모욕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두환 정치’ 발언의 심각성은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 어렵사리 합의한 기본 가치를 훼손했다는 데 있다. 통상 한 사회의 기본 가치를 되돌리는 시도는 주변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폭민’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폭민을 막으려면 중심부 집단이 이 같은 시도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야 한다. 중심부 책임론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중심부 집단이 기본 가치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고무하느냐, 경고하느냐에 따라 한 사회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대선은 ‘51 대 49’라는 정치 게임의 결승전이다. 단 1%라도 더 얻기 위해 기본선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역대 대선의 암묵적 룰이었다. 그런데 야권 유력 대선 주자가 직접 나서서 이 룰을 깨뜨렸다.

‘주둔군 이론’이 있다. 천근만근 더해지는 인생의 철조망을 헤쳐가다 보면 상처가 생기고 덧나기도 한다. 그런데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행복한 기억이 아닌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린다는 것이 ‘주둔군 이론’이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많은 희생이 필요한 것처럼 인생의 전장도 힘들수록 많은 자원(주둔군)을 남긴다는 것. 5월 광주가 살아남은 자들에겐 그런 곳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죄의식은 수천수만의 ‘주둔군’을 5월 광주에 두고 왔다. 그 주둔군들은 지금도 진상규명과 가해자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전두환 정치’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가장이 결정됐다. 2인자라는 이유가 자국민을 학살한 만행의 면죄부가 될 수 있겠는가. ‘학살을 추모하는 역사는 없다.’ 김남주의 시 ‘학살 3’으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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