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청년 ‘간병살인’ 비극에…정치권도 ‘영케어러’ 정책 마련 촉구

김향미 기자
간병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화백

간병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화백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백혈병 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는 스무살 A씨. 위궤양·당뇨 등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중학교 3학년 B양.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고관절 수술을 한 후 3개월 이상 일을 못해 형편이 어려워지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준비에 나선 고등학교 3학년 C군.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지난 8월 제출받은 기초생활수급·긴급복지 지원 대상자 중 만 25세 미만 청소년·청년 사례들이다. 이들은 젊은 나이에 가족돌봄·간병을 도맡은 이른바 ‘영케어러’(Young Carer)로 추정된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병하다 경제적 어려움에 아버지를 굶겨 사망에 이르게 한 22세 청년 강도영(가명)씨 사건이 최근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영케어러’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강도영 사건’에 질타 여론…정치권도 쓴소리

‘셜록’의 보도를 보면 대구에 살던 강씨의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지난해 9월 뇌출혈로 쓰러져 온몸이 거의 마비돼 누워 생활하는 처지가 됐다. 병원비 약 2000만원은 강씨의 삼촌이 부담했지만, 병원비를 더 감당할 수 없게 된 강씨는 아버지를 지난 4월 퇴원시켰다. 휴대전화, 도시가스도 끊긴 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강씨는 아버지를 돌보지 못하고 굶겨 사망에 이르게 했다. 1심에서 존속살해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오는 10일 강씨에 대한 2심 선고를 앞두고 ‘강도영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 서명에 지난 6일 오후 6시 기준 약 6000명이 동참했다고 ‘셜록’은 밝혔다.

강씨 사건이 알려지자 대선 후보들이 목소리를 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7일 페이스북에 강씨 사건 기사를 공유하며 “22세 대구 청년의 비극을 다룬 기사에 마음이 멈췄다”며 “마침 엊그제 대구에 다녀왔던 길이라 마음이 더 무겁고 복잡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강씨 선처 탄원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도 지난 5일 페이스북에 강씨 선처 탄원에 서명한다면서 “스물둘 청년의 이야기에 가슴이 무너진다. 패륜이냐, 연민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비극 앞에서 국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의 문제”라고 적었다.

최기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일 열린 국회 예결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강씨 사건을 언급하며 강씨가 복지체계에서 누락된 점, 강씨 아버지 사망 이후 복지부가 재발방지책 마련에 소극적이었던 점 등을 지적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분들조차 최대한 국가가 자신들에게 다가온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지 못한 것은 저희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기초생활보장제나 긴급복지 지원 등 기존 복지제도 안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본인이 신청하지 않아 실제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사자 신청이 없더라도 단전·단수 등 ‘위기 신호’를 통해 위기가구를 발굴하겠다고 정부·지자체가 밝혀왔지만 이번 사건만 보면 강씨의 아버지가 숨진 뒤에야 지자체 관리망에 이름이 올랐다.

권덕철 복지부 장관은 “이런 사건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여러 복지제도가 있었음에도 5년 내에 지자체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권 장관은 “복지 정책이 ‘신청주의’로 운영돼다 보니 (강씨가) 몰라서 안 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이웃이나 지역 공무원들과 적극적으로 (위기가구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 의원은 병원에서 강씨의 사례가 복지기관으로 연결되지 않은 점, 간병비가 600만원에 달했으나 긴급간병서비스가 지자체 자율 도입에 그쳐 강씨가 지원을 받지 못한 점 등도 지적했다. 권 장관은 “재난적 의료비란 제도가 있어 병원의 의료사회복지팀이 안내해주도록 돼 있지만 이번(강씨의 경우)에는 잘 되지 않았다. 앞으로 병원에서 잘 안내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긴급간병서비스도 사회서비스원이 각지에 설치되면 전국 단위에서 긴급돌봄이 제공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케어러, 해외선 법률 제정해 지원

최 의원은 “부모의 부양을 받아야 할 나이에 (가족을) 부양을 해야 하는 청년이라면 사회적 경험과 경제력이 약할 가능성이 높고, 미래를 포기하지 않으면 간병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을 ‘영케어러’라고 부르는데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저출생·고령화 사회로 가면서 ‘영케어러’도 함께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영국은 2019년부터 영케어러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고, 호주에서도 2010년 법이 제정돼 영케어러 대상 학비보조금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올 4월 첫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전국의 중학교 2학년 학생의 6%,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4%가 영케어러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정부는 육아, 가사노동, 간병 등으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영케어러들에게 가사노동 지원, 간병 지원 등을 제공하고 온라인 상담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김성주 민주당 의원실이 복지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영케어러’로 추정할 수 있는 만 25세 미만 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2020년 기준 3만1921명, 긴급복지 지원 대상자는 559명이다. 최근 3년간 위기가정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만 18세 미만 청소년의 부모 또는 조부모 부양 현황을 보면 2018년 14명, 2019년 10명, 2020년 16명, 올해는 7월까지 16명이다.

김 의원은 지난달 28일 영케어러 지원 근거 마련을 위해 ‘청소년복지 지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영케어러를 ‘가족돌봄청소년’으로 명명하고 ‘부모가 사망·이혼·가출하거나 장애·질병 등의 사유로 노동 능력을 상실해, 스스로 가족구성원을 돌보거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청소년’으로 정의했다. 개정안은 여성가족부가 중심이 돼 교육부 등과 같이 청소년의 가족돌봄·부양 실태를 조사하도록 명시하고, 여가부·지자체장이 관련 지원 방안을 마련하도록 규정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정의한 영케어러(www.mhlw.go.jp/stf/young-carer.html).  번역 자료 김성주 의원실 제공

일본 후생노동성이 정의한 영케어러(www.mhlw.go.jp/stf/young-carer.html). 번역 자료 김성주 의원실 제공

영케어러 지원 관련 질의에 권 장관은 “최근에 청년특별대책을 준비하면서 영케어러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알게 돼 실태조사를 먼저하려고 한다. 필요한 복지·보건 서비스가 무엇인지 조사·연구를 통해 제도화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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