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필명으로 씁니다.
나의 부엌엔 전자레인지가 없다. 이렇게 산지 올해로 4년째다. 기숙사와 셰어하우스를 거쳐 완전한 1인 생활을 시작하면서 집에 이것저것 사들였지만, 전자레인지만은 예외였다. 전자레인지가 집에 있으면 편의점 음식만으로 매 끼니를 때울 것만 같았다. 즉석밥도 쉽게 돌릴 수 있고 식은 음식을 다시 간편하게 데울 수 있지만, 자극적인 간편식의 유혹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강수를 뒀다.
에어프라이어 두부구이. 물기를 제대로 빼지 않으면 익으면서 흥건하게 물이 나온다. 먹는데 상관은 없다. 연희동달팽이
전자레인지만 없으면 냉동식품과 레토르트 식품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건강한 식생활을 할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무언가를 만들어 먹으려면 화기를 이용해야 하고, 그러려면 냄비나 팬이 필요하고, 그러면 설거지가 생기고(이쯤에서 떠오르는 생각, 아 귀찮고 귀찮다), 결국 조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시리얼, 컵라면 등을 먹게 됐다. 스스로에 대해 반은 알고(간편식의 유혹에 약함) 반은 몰랐던(생각보다 귀찮음의 정도가 매우 심함) 셈이다.
이렇게 건강과는 좀 거리가 있는 ‘노 전자레인지 식생활’을 이어가던 중 에어프라이어를 선물로 받았다. 과연 신세계였다. 냉동 상태의 핫도그, 윙, 치즈볼 같은 음식을 넣고 타이머만 돌리면 바삭하게 조리됐고, 봉지 과자마저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갔다 나오면 갓 구운 것처럼 생생해졌다. ‘에어프라이어 전용’ 문구를 붙이고 나온 제품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 같이 다 편하고 맛있던지 하마터면 냉동식품의 세계에 빠져 못 헤어나올 뻔 했다.
그 때쯤 또다른 신세계를 만났다. ‘에어프라이 조리법’. 트위터, 블로그에 소개되는 에어프라이어 조리법은 이미 만들어진 음식을 데우는 수준이 아니었다. 재료를 다듬어 만드는 요리였다. 유명한 ‘문디목딱나무(?) 고구마’ 레시피(고구마 껍질을 벗겨 숭덩숭덩 썰어 180도에 20분 돌리면 겉은 건조한듯 꾸덕꾸덕하고 속은 촉촉하고 포슬포슬한 고구마를 맛볼 수 있다. 구워놓은 모양이 꼭 나무 같다고 누군가 저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를 시작으로, 넣었다 꺼내면 되는 에어프라이어 조리법에 빠져버렸다. 쉽고 간편한데 건강한 느낌이 든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프라이어에 무화과를 넣으면? 꾸덕꾸덕하게 말린 무화과 말랭이를 먹을 수 있다. 고온에 꽤 여러번 뒤집어 굽는 수고를 거쳐 만들어야하지만 그냥 먹어도, 요거트에 곁들여 먹어도 맛있다.
얼마 전에는 ‘연두 두부구이’를 만들었다. 역시 초간단 재료로 만들 수 있다. 부침용 두부 300g 한 모의 물기를 뺀 다음, 십자 모양으로 촘촘히 칼집을 내고 그사이에 채식 조미료인 ‘연두’ 2스푼과 올리브유 1스푼을 섞어 골고루 뿌려준다. 후추 등 향신료를 취향껏 넣어도 좋다. 200도에서 20분간 구워주면 끝. 에어프라이어에서 나온 두부는 겉은 팬에 구운 듯 바삭했고 속은 끓는 물에 데친 듯 부드러웠다. 들인 수고에 비해 깔끔하고 건강한 맛이 만족스러웠다.
손이 많이 가야만 맛있는 음식인 건 아니다. 조리법이 간단하다고 몸에 나쁜 요리인 것도 아니다. 쉽고 간단해도 맛있고 기분좋게 먹는 방법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상상할 수 있는 조리법의 폭이 넓어질수록 끼니를 지어 먹는 일이 재밌어졌다.
트위터에서 유행한 ‘문디목딱나무 고구마’. 레시피에선 껍질을 깎으라고 했지만 그것마저 귀찮았던 나는 그냥 깨끗이 씻어서 구웠다. 연희동달팽이
에어프라이어에 냉동식품 아닌 제철 채소를 구워 먹으면서 알았다. 기기 또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자레인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냉동식품 만을 위한 도구란 선입견을 버리고 나니, 전자레인지로 양배추를 간편하게 쪄 먹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이젠 들여도 될 것 같다. 전자레인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맛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연희동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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