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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구장이 좁을 땐 수비를 좁혀서 해야 돼. 사람만 보지 말고, 볼하고 사람을 같이 봐. 상대팀에 발이 유독 빠른 선수들이 있으니까.” 지난 13일 오전 8시30분 광주시여성축구팀 ‘맏언니’인 김미화씨(54)는 동료 선수들과 식사를 하며 바쁘게 경기 전략을 세웠다. 경기도지사기 어울림축구대회 경기 당일 아침이었다. 첫 상대는 과천시여성축구팀이었다. 광주팀은 지난해 이 대회에서 과천팀에 밀려 준우승을 했다. 첫 경기부터 ‘설욕전’이자 ‘강 대 강 매치’인 셈이었다. 선수들은 “대진운이 없다”면서도 “이번에 한 번 이겨보라고 이렇게 대진표가 짜진 것 아닐까”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지난 13일 오후 광주시여성축구팀 박선영씨(35)가 전반전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어낸 뒤 동료 선수와 손을 맞잡고 환호하고 있다. 이두리 기자

지난 13일 오후 광주시여성축구팀 박선영씨(35)가 전반전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어낸 뒤 동료 선수와 손을 맞잡고 환호하고 있다. 이두리 기자

20대부터 50대까지, 소위 ‘선출(선수 출신)’부터 축구를 갓 시작한 아마추어까지 다양한 특기와 경험을 지닌 여성들이 그라운드 위를 누빈다. 호칭은 ‘언니’로 통일된다. 오후 1시 경기 양평군 지평레포츠공원에서 광주팀과 과천팀의 경기가 시작됐다. 관객들은 “국가대표 경기보다 이게 더 재밌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전반전은 과천팀이 선제골을 넣은 이후에도 아슬아슬한 접전이 이어졌다. 광주팀 박선영씨(35)가 프리킥으로 동점을 만들자 필드와 선수 대기석 모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박씨는 “지고 있다가 골을 넣으니까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들뜬 분위기 때문일까. 광주팀은 후반전에 조급해 보였다. 광주팀 선수가 두 번의 파울로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당했다. 광주팀은 볼 점유율이 높았음에도 좀처럼 골을 내지 못했다. 전세를 뒤집으려고 선수 교체를 준비했지만 과천팀의 역전골이 한 발 빨랐다. 경기 종료 신호가 울릴 때까지 양팀의 공방이 계속됐지만 결과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과는 1 대 2로 광주팀의 패배였다. 다음 경기에 대비해 한 솥 가득 채워온 어묵꼬치는 퉁퉁 불은 채 선수단과 함께 때이른 퇴장을 해야 했다. 이번 경기에서 미드필더로 활약한 광주팀 정우리 감독(40)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번처럼 예선에서 탈락한 적은 없었기에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경기 광주시에 여성축구팀이 만들어진 건 2002년이다. 월드컵 붐에 힘입어 창설됐지만 초창기 반응은 미미했다. 김씨는 “그때만 해도 여성들한테 축구가 생소한 운동이니까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이장님 부인이며 부녀회장까지 무작위로 차출해서 나갔다”고 회상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여성들에게도 ‘생활축구’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2020년 기준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남성 축구 동호인 수는 10만6524명인 반면 여성 축구 동호인 수는 3291명에 불과하다. 팀 수로는 남성팀은 2701팀, 여성팀은 122팀이다. 여성팀은 운동장을 빌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남성팀 연습이 없는 날로 일정을 잡거나, 규모가 작은 풋살장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지난 13일 경기도지사기 어울림축구대회에 출전한 광주시여성축구팀 이장미씨(47)가 경기 전에 몸을 풀고 있다. 이두리 기자

지난 13일 경기도지사기 어울림축구대회에 출전한 광주시여성축구팀 이장미씨(47)가 경기 전에 몸을 풀고 있다. 이두리 기자

‘연령 단일화’도 여성 축구 활성화를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다. 남성 생활축구와 달리 여성은 전 연령이 하나의 리그에서 경기를 한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별로 리그를 세분화한 ‘언니들의 축구대회’를 운영 중인 신혜미 위밋업스포츠 대표(44)는 “지금 시스템에서는 중장년층 여성들이 의욕을 잃고 팀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때 운동장을 누비는 ‘체육 소녀’였던 여성들은 서른 살이 넘어 축구에 눈을 떴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니까 맨날 우리 아들이랑 운동장에서 놀았거든. 그러다가 어떤 언니가 ‘너 축구 해 볼래’라고 해서 ‘싫다’고 빼다가 한 번 나가 본 거야.” 이장미씨(47)는 경기장으로 향하는 내내 “언니, 이걸 하니까 재밌지 않아? 활력이 생겨”라고 말하며 들뜬 기색이었다. 십대 시절 육상을 했던 조옥순씨(51)도 아들 축구 경기를 보러 다니다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 ‘여성 축구회 모집’ 현수막을 보고 축구를 시작했다. “시집 가고는 운동을 거의 못 하고 집에만 있었지, 살림하고.” 조씨는 지금 20대부터 60대까지를 아우르는 혼성 축구팀을 만들어 운영할 정도로 축구에 열성이다.

이날 광주팀 골키퍼로 활약한 정다예씨(31)는 축구선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5살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골키퍼나 최전방 공격수처럼 극단적인 포지션이 좋아요. 골을 넣거나, 막거나.” 여성축구는 팀이 적어 성공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아버지의 만류로 축구선수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러나 정씨는 여전히 “저 자체가 축구인 것 같다”고 말한다. 축구를 시작한 계기도 제각각이다. 신시오씨(31)는 2년 전 축구를 처음 접했다. “경상도에 살다가 경기도로 이사를 오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축구팀에 들어오게 됐어요.” 이날 경기에 교체 선수로 벤치를 지킨 신씨는 “한 번도 못 뛴 게 너무 아쉽다”고 했다.

지난 13일 오후 광주시여성축구팀 선수 표나라씨(34)와 김수지씨(35)가 경기 시작 전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테이핑을 하고 있다. 이두리 기자

지난 13일 오후 광주시여성축구팀 선수 표나라씨(34)와 김수지씨(35)가 경기 시작 전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테이핑을 하고 있다. 이두리 기자

여성 축구를 향한 시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10년째 최종 수비수인 ‘스위퍼’ 포지션을 고수 중인 김정혜씨(40)는 “주말에는 축구만 하니까, 축구랑 사귀냐는 말도 듣는다”고 말했다. “제가 축구를 시작한 서른 살 때 주변 남자 지인들이 다리도 굵어지고 성격도 버릴 텐데 여자가 무슨 축구를 하냐고 했었는데, 요즘 여성 스포츠가 매스컴을 타면서 이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아요.” 김씨는 “축구는 그냥…사랑”이라고 했다.

이날 골을 넣은 박선영씨도 “주변 여성 지인들에게 ‘멋있다, 나도 한 번 배우고 싶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축구를 하면서 부상을 입어 총 네 번의 수술을 했다. “마지막에 수술했을 땐 제발 걸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또 뛰고 나니까 축구를 계속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몸을 사리면서 하죠. 저는 이제 ‘재미 축구’예요. 득점 욕심보단, 운동이 좋은 것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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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리 감독은 “뉴욕 양키스 요기 베라의 명언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이 바로 축구”라고 했다. 조옥순씨와 이장미씨는 경기가 끝난 뒤 “제대로 못 뛴 게 아쉽다”며 식사도 거르고 다른 연습 경기가 있는 구장으로 향했다. 이날 경기는 아쉽게 패했지만 이들은 그라운드 위를 계속 달릴 것이다. 숨이 터질듯 차오를 때까지.


이두리 기자 redo@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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