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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사과를 망치는 법

입력 2021.11.29 03:00

수정 2021.11.2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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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중 <금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 중 하나다. 금강경의 경문에는 아상(我相)을 지우라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된다. 아상은 본래 브라만교의 ‘아트만(atman) 의식’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지만, 복잡한 교리 이야기를 빼고 실천적 의미만 보자면 아상을 지운다는 것은 나와 내 것과 내 생각을 중심으로 삼는 세계관을 여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집과 이기심을 버리는 것쯤 된다. 아상을 지울 마음이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뭐냐고 한다면,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사과할 수 있는지 여부라고 단언하겠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좀 오래된 미국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다. 범죄조직의 두목인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들이 자기 친구에게 사과한다면서 “나는 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한다.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니?” 사과면 사과지, ‘생각한다’라는 말은 왜 붙이냐는 것이었다. 아들이 그 말을 빼고 다시 사과하는데, 저 세계에서도 제대로 된 사과가 그리 중요하구나 싶었다. 여러 편 보았던 일본 드라마에 나온 일본인들의 사과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사과할 일이 있으면 누구에게든, 심지어 배우자나 애인에게도 반드시 일어서서 표정을 엄숙하게 한 다음 분명한 목소리로 “사과 드립니다”라고 말하면서 적어도 45도 이상 상반신을 굽히는 것이었다.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 이행이 사과의 중요한 효용
윤석열의 사과 진정성 여부는
앞으로의 행동에 달려 있지만
아집과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이상하거나 잘못된 사과도 많다. 첫째, 조건을 달거나 가정형으로 말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말머리를 “네가 기분 나빴다면”이나 “네 생각이 그렇다면”이라고 시작하는 것이다. 사과는 맥락을 떠나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둘째, 종결어미로 문장을 맺지 않고 뭔가 딴소리를 붙인다. “내가 잘못했지만, 그건 이런 사정이 있었던 거야”라거나 “내가 잘못했다고 쳐도, 그럼 너는 왜 그랬던 거냐?”라고 하여, 사과보다는 변명에 방점을 두거나 변명을 위주로 말을 이어 가고 심지어 상대방에게 따지는 식이다. 요컨대 군더더기를 붙인다. 셋째, 잘못했다거나 사과한다고 하지 않고 다른 용어를 쓴다. 예를 들어 ‘유감’은 이 상황은 너나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서 내 감정이 섭섭하거나 불만스럽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북한군이 1976년 판문점에서 저지른 도끼 살인 사건의 마무리 과정에서 김일성이 내놓은 메시지에 나온 말이 “유감이다”였다. 일왕 아키히토가 1990년 일본의 식민통치를 놓고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라고 한 것도 비슷한 예다. 넷째, 사과의 전제되는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축소하면서 두루뭉술하게 사과한다고만 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의 언동이 재발할지 아닐지 알 도리가 없다. 다섯째, 말로는 사과한다고 하면서도 마지못해 하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진심이 아님을 시사하거나 말하고 난 후 딴짓을 하여 실질적으로 사과의 뜻을 뒤집는다. 여섯째, 사과에 걸맞은 행동, 예를 들어 손해배상이나 기타 실질적인 회복 조치를 하지 않는다.

사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들의 말로는, 제대로 된 사과란 잘못된 일에 책임을 인정하고 뉘우침을 표현하는 것, 용서를 구하는 것,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약속하는 것의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이는 사과의 세 가지 기능, 즉 서로 간에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한 합의를 사과로 재확인함으로써 신뢰와 안전감을 회복시켜 주고, 잘못된 언동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잘못된 일로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이다. 법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저서 <분노와 용서>에서 사과의 중요한 효용으로 잘못된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이행을 들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전두환 옹호’ 발언과 관련해서 ‘유감’이라는 말을 쓰더니 그 직후엔 다시 측근이 인스타그램 계정에 개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려서 논란을 빚었다. 다만 광주의 5·18민주묘지에 참배하러 가서 내놓은 사과의 언사는 진지했고 표정과 동작도 엄숙했으니, 그것만 보면 이를 ‘정치 쇼’라고 폄하하는 주장에 선뜻 동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윤 후보의 사과가 진정성을 가질지는 앞으로의 행동에 달려 있다. 먼저 그는 전두환이 짓밟았던 공동체의 가치, 즉 인간의 생명과 자유와 기본적 인권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빼앗을 수는 없다는 정치철학에 자신이 합의하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 또 그동안의 여러 실언과 그 해명에서 드러난 아집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러려면 두툼해 보이는 아상부터 지워야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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