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필명으로 씁니다.
카페인에 민감한 몸으로 변하면서 커피 한 잔이 소중해졌다. 저녁 늦게 커피가 마시고 싶어지는 날이면 빨리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유난히 일찍 자려고 노력하는 밤이 있다.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은 날이면 그렇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 시라도 빨리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으로 변해버려 오후 2시가 넘어가면 수면에 영향을 미칠까 저어하게 됐다. 그래서 커피가 너무 고픈 밤이면 얼른 잠들어버린다.
“커피 더블샷에 샷 추가 해주시고요. 얼음은 빼지 말고 톨 컵에 담아주세요.”
메뉴판에는 없는 더블샷은 에스프레소 샷 2개에 우유와 크림, 시럽을 넣고 얼음과 함께 흔들어서 칵테일처럼 만든 찬 음료다. 우유가 아주 소량만 들어가 쌉쌀한 맛이 강하지만, 시럽과 크림도 덜 희석돼 ‘단쓴단쓴’한 게 매력이다. 정해진 제조법대로라면 용량에 딱 맞는 전용 잔에 담기지만, 샷 하나를 추가하고 원래 빼고 주는 얼음도 같이 받아야 하기 때문에 톨 사이즈 컵에 달라고 주문한다.
10여 년 전 즐겨 마시던 나만의 에너지 음료 ‘쓰리샷’의 레시피다. 한 모금 들이켜면 전신을 깨우는 카페인의 짜릿함에 중독된다. 마감할 기사가 많거나 취재가 형편없이 안 되던 날이면 쓰리샷을 시켜놓고 자학 같은 힐링을 했다. 가끔 ‘괜찮겠냐’며 점원의 걱정하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하루 3~5잔씩 커피를 마셔도 위장 건강과 수면의 질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젊은 신체였기에 마셔도 좋았다.
더블샷은 숏 사이즈 음료컵보다 작은 전용잔이 있지만 여기에 샷을 추가하고 얼음과 함께 마시려면 톨 사이즈 컵에 담아야 한다.
광란의 커피 파티는 직장인이라면 통과 의례처럼 겪는 역류성 식도염에 시달리면서 막을 내렸다. 위 한 쪽이 뻐근해지면서 신물이 올라오는 증상은 아무리 옅어도 커피 한 방울이면 재발됐다. 두통과 무기력증이라는 금단 현상에도 정상적 섭식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커피를 끊었다. 지금은 많이 회복돼 하루 1.5잔 정도, 예전 커피양 기준 3분의 1도 안 되는 커피는 마실 수 있다. 매일매일이 감질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길게 오래 마시려면 어쩔 수 없다.
제대로 된 한 잔을 마주하는 시간은 그래서 귀하다. 커피를 마시려고 일찍 눈을 뜬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도구를 준비한다. 드리퍼, 거름지, 머그잔 그리고 좋아하는 원두. 몸에 새겨진 매뉴얼이 계산하지 않아도 적량의 원두를 덜어 거름지를 끼운 드리퍼에 쏟는다. 끓인 물을 원두 위로 원을 그리며 조금씩 조금씩 부으면 주방에서 시작된 향긋함이 거실까지 퍼진다. 향과 맛이 충분히 퍼질 수 있도록 한 모금씩 아끼고 아껴서 목으로 넘긴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이상한 목소리로 이른 아침 커피 한 잔을 쥐고 나누는 대화. 밤새 집안의 공기와 온도, 오늘의 예상 날씨, 어제 먹다 남은 잔반 등 시시콜콜한 거리들. 대화의 상대는 가족 혹은 가족만큼 가까운 내 사람. 그 존재가 주는 든든함과 커피 향이 어우러져 더 들뜨게 되는 기묘한 아침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소중한 한 잔을 내리기 위해 준비된 커피 도구들. 같은 도구인데 바리스타 모닝 에인절의 손을 거치면 훨씬 맛있게 내려진다.
한때 커피를 다루는 걸 직업으로 뒀던 친구와 같이 맞이하는 아침이면 눈은 더 빨리 떠진다. 같은 도구, 같은 동작인데 맛과 향은 배가 된다. 의식처럼 이어지는 동작으로 커피 내리는 ‘모닝 에인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묻는다. “왜 물을 그렇게 조금만 넣어?” “처음에 확 부으면 물길이 생겨서 커피가 고루 안 내려져.” “거름지는 왜 먼저 헹궈?” “종이 냄새 안 나게.” “커피가 더 안 우러날 때까지 물 넣는 거야?” “아니, 적당히 됐으면 그만 우리고 차라리 내린 커피에 물을 타서 먹으면 더 맛있어.” “게이샤 원두는 값만 비싸고 입맛에도 안 맞고 위만 아프더라?” “위가 안 좋으니까 산미에 예민할 수도 있어.” “탄 맛 나는 게 맛있는 거 아냐?” “한국 사람들은 강배전을 좋아하지.” “1인분은 원두 몇 g이야?” “7g인데도 있고, 12g인데도 있고 자기 기준이 있지. 넌 3g이 좋다며!”
한 잔을 음미하는 동안 연쇄 질문 직업병에 걸린 기자의 질문에도 꼬박꼬박 답해주는 친구와 함께 마시는 커피는 정말 행복한 맛이다. 쓰리샷을 나누던 커피 메이트. 이제 하루 한 잔이 소중해진 것까지 닮은 동년배, 오래오래 같이 마십시다.
엄격한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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