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화가, 이웃을 사랑한 작가, 가난, 위작 논란, 천문학적인 그림 가격…”
모두 박수근(1914~1965)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입니다. 초·중·고교 미술 교과서에서부터 지겹게(?) 들어온 ‘위대한 화가 박수근‘이라는 명제에 가려 정작 박수근의 진면목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국립현대미술관이 박수근을 재조명하는 전시를 준비한 배경입니다. 해묵은 수식어 속에 박수근을 가두지 않고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익히 들어온 ‘국민 화가’라는 타이틀은 내려놓고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 박수근을 지금부터 찬찬히 만나보겠습니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62, 캔버스에 유채, 130x89cm, 리움미술관 ㅣ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먼저 박수근의 삶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박수근은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통해 화가로 데뷔했습니다. 12살 때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면서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화가라면 다들 다녀왔다는 일본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박수근, 철쭉, 1933, 종이에 수채, 36x45cm, 개인소장 ㅣ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여기서 주저앉았다면 박수근의 이름을 후세가 기억하고 있을 리 없겠지요? 그는 굴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이어갑니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었던 오득영의 격려를 받으면서요. 마침내 18세가 되던 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이라는 성적을 거둡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대회로, 미술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조선인이 입선을 차지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거의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냈고, 1953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전람회에 다수 참여하며 중견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생전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작가로 많이들 알고 계실텐데, 실상은 달랐던 거지요. 지금처럼 ‘국민 화가’로 추앙받는 반열까지 올라선 건 아니었지만 나름 중견 작가로서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대적 환경이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결국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작가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에게 ‘미군의 초상화가’라는 타이틀은 결코 내세울 만한 경력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박수근이 직접 작성한 이력서를 선보이는데 여기에 ‘초상화가 이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미군 PX에서 초상화가로 일하던 박수근을 만났던 작가 박완서(1931 ~ 2011)는 훗날 자신의 데뷔작 ‘나목’에서 당시 박수근이 참혹한 시기를 얼마나 묵묵히 견뎌냈는가를 증언합니다.
박수근은 초상화가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작은 집을 마련해 정착합니다. 창신동에서 살았던 10년(1952~1963)은 그가 화가로서 가장 전성기를 누리던 시간이었습니다. 1956년에는 국내 최초 갤러리인 반도화랑의 개관전으로 2인전을 열어 많은 작품을 판매했습니다. 반도호텔에 투숙하던 외교관과 사업가들이 그의 작품을 수십 점씩 사 갔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만난 후원자이자 반도화랑의 단골 고객이었던 밀러 여사는 귀국 후에도 박수근에게 물감이나 화구를 보낼 정도로 열성 팬이었습니다. 1959년에는 국전 추천작가가 돼 그해 열린 8회부터 14회 대회까지 심사도 거치지 않고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1961년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고요. 같은 해 주한미공군사령부가 개최한 ‘박수근 특별 초대전’에서는 많은 작품들을 외국 애호가들에게 팔았습니다. 화가로서의 위상은 계속 올라갔지만 살림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박수근은 결국 건강 악화로 51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 전경 ㅣ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전시 <봄을 기다리는 나목>은 관람객들이 박수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과 유족, 연구자, 소장자의 협조로 모두 174점이라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를 만들었습니다. 33점의 ‘이건희 컬렉션’ 중 31점과 ‘노인들의 대화’ 등 유화 7점, 삽화 12점이 관람객들을 처음으로 만납니다.
놀랍게도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번째 ‘박수근 전시’입니다. 고가의 보험료와 작품 소장자 섭외가 어려웠고, 무엇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박수근의 작품이 몇 점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추진한 박수근 전작 도록 사업으로 싹을 틔운 박수근 기획전은 지난 4월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급물살을 탔습니다.
전시는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 등 총 4부로 구성했습니다. 박수근이 19세에 그린 수채화부터 51세로 타계하기 직전 제작한 유화까지 그의 작품을 총망라했습니다. 관련 자료와 한영수(1933 ~ 1999)의 사진도 함께 모았습니다. 한영수는 박수근이 살아생전 거닐었던 거리를 비롯해 전쟁 직후 서울의 풍경을 렌즈로 포착해 온 사진가입니다.

한영수, 서울, 1956-1963, 인화지에 젤라틴 실버프린트, 40.3x50.3cm, 한영수문화재단 ㅣ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장을 천천히 돌아보다 새롭게 발견한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박수근은 고집 있는 화가였습니다. 추상미술이 유행이던 당대 미술 경향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주위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그렸습니다. 형편이 어려웠던 만큼 당시 유행 사조를 따랐다면 생활이 조금 더 나아질 수도 있었지만 그의 선택은 세속의 성공보다 자신만의 그림 추구였습니다. 박수근의 ‘장인 정신’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생계형 작가였습니다. 자신의 화풍만을 고집하기엔 현실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림 판매로 가족을 부양했던 박수근은 비슷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어깨가 조금 다르거나 머리 모양이 조금 다르게 그리는 식으로 작품을 양산했습니다.

박수근, 판잣집, 1950년대 후반, 종이에 유채, 20.4x26.6cm,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ㅣ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셋째, 그렇다고 남루한 현실을 피하거나 꾸미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더 어렵게 그리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담았습니다. 박수근이 살던 창신동은 한옥과 판잣집이 혼재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모여들며 판잣집이 늘어가던 당시의 시대상을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았을 판잣집인데 나름 다양한 색을 사용했습니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색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곳에만 사용하며 색을 극도로 자제했던 박수근의 다른 작품과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숨은 면모를 발굴하고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김예진 학예사를 만나 이번 전시 준비 과정의 숨은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어봤습니다. 그와의 인터뷰는 다음 콘텐츠에서 이어집니다.
■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11월 11일(목) ~ 2022년 3월 1일(화)
10:00 - 18:00
월요일 휴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문의 : 02)2022-0600
자료 및 사진 ㅣ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