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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너츠의 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다

입력 2021.12.15 09:42

수정 2021.12.1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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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필명으로 씁니다.

연못을 하나 파고 믹스너츠를 가득 쏟아부은 후 그 안에서 헤엄치고 싶다. 어차피 믹스너츠에는 방부제와 각종 MSG가 가득 들어가서 쉽게 썩을 일도 없을 거다.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한다면 당연히 믹스너츠를 고른다. 몇 입 먹고 질려버려 후회할 게 분명하지만 좀 쉬었다가 먹으면 또 짜릿할걸. 모든 논리를 불식하는 얄팍하고 영악한 맛. 그치만 그 정도면 평생을 걸기에 충분하다. 믹스너츠가 사람이라면 한번 만나서 얘기라도 해 보고 싶은데. 이봐요 대체 나한테 왜 이러세요. 하지만 사랑합니다. 이런 걸 애증이라고 한다지. 내가 알기로 애증은 사랑보다 지독한 사랑이다.

본가 밥상엔 믹스너츠가 올라온다. 아니 내가 올려놓은 건가? 난 돼지김치찜보다 믹스너츠가 백배쯤 좋다. 반숙이

본가 밥상엔 믹스너츠가 올라온다. 아니 내가 올려놓은 건가? 난 돼지김치찜보다 믹스너츠가 백배쯤 좋다. 반숙이

이 악취향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아빠는 모든 음식에 땅콩을 넣었다. 제육볶음에, 먹다 남은 찌개에, 생선조림에. 아빠가 내어주는 음식의 화룡점정이랄까. 양념과 국물이 스며들어 녹진해진 땅콩의 맛이 좋다고 했다. 질색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난 좋았다. 멋진 베리에이션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엔 언제나 땅콩이 있었다. 그것도 김치냉장고 한 칸을 다 채우도록 넉넉하게. 나는 하교 후 아빠의 소주잔에 땅콩을 가득 담아 한참을 와드득거리며 먹곤 했다. 기분이 안 좋은 날엔 커다란 웍에 땅콩을 퍼넣고 약불에 한참을 볶았다. 그럼 왠지 마음이 풍족해졌다.

그 많은 땅콩은 다 어디에서 온 걸까

예천 외할머니는 주기적으로 택배를 부치셨다. 아빠 이름이 틀리게 적힌 택배 박스를 열면 땅콩이 있었다. 가끔은 우리 가족이 예천으로 내려가 외할머니와 함께 시장 쇼핑을 했다. 땅콩은 일 순위 구매 품목이었다. 난 밥을 잘 먹지 않아서 집안 어른들 속을 지지리도 썩인 십 대였다. 외할머닌 그런 내가 그나마 잘 먹는 음식들을 단단히 기억하고 계셨다. 고등어, 청국장, 반숙후라이, 땅콩. 그날 엄마와 아빠와 나와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사 온 땅콩을 외할머니의 좁은 안방에 풀어놓고 한 알 한 알 씹어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외할머니의 집에 외할머니가 없다. 아빠의 이름을 틀리게 택배를 부쳐주는 사람도. 외할머니의 땅콩도.

일할 때 가끔 전통시장을 지나가는데 이런 게 있으면 홀린듯 산다. 내가 산 게 아니다. 내 영혼이 산 거다.

일할 때 가끔 전통시장을 지나가는데 이런 게 있으면 홀린듯 산다. 내가 산 게 아니다. 내 영혼이 산 거다.

여전히 나를 위한 땅콩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다. 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오포 할머니의 텃밭에는 매년 땅콩이 자란다. 늙은 호두나무도 있다. 할머니는 땅콩을 캐고 호두알을 주워 단단한 껍데기를 하나하나 깨서는 가장 먹기 좋은 알맹이만 남겨 내게 한가득 안겨주신다. 니가 밥은 안 먹는데 이런 건 잘 먹더라. 하시면서. 지금도 자췻집 냉장고 한 칸을 할머니가 주신 땅콩과 호두가 채우고 있다. 두 할머니 덕분에 내 인생은 약간의 땅콩바다가 됐다. 만족스런 식생활이다.

어른이 되고 나니 몸에 더 안 좋고 그만큼 더 맛있는 음식들을 스스로 사 먹는 데에 대범해졌다. 예전엔 친환경 유기농 홈메이드 땅콩 호두에 만족했다면 이젠 온갖 악독한 감미료로 칠갑이 된 믹스너츠에 눈이 돌아간다. 구성은 비슷비슷하지만 브랜드마다 그 맛은 죄다 다르다. 마트와 시장마다 각각 다른 브랜드의 믹스너츠를 구비해 놓기 때문에 지나가다 마트가 있으면 홀린 듯이 들어가 견과류 코너를 스캔한다. 마음에 드는 믹스너츠를 발견해 품에 안으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해질 수가 없다. 끼니도 술안주도 믹스너츠 한 통이면 ‘OK’다. 물론 영양성분은 ‘NOT OK’겠지만. 이런 길티플레져에 취해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예전에 살던 자취방 근처에 오래된 호프집이 있었다. 생맥주가 오백씨씨에 삼천 원이라 좋았고 무엇보다 기본 안주로 땅콩을 내주는 것이 훌륭했다. 요즘 보기 드문 서비스였다. 자주 가진 않더라도 그런 곳이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즐거웠는데. 코로나가 한창이던 작년 문을 닫았다. 사랑하는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인 걸까. 믹스너츠를 씹으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창원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창원엔 이주노동자가 많이 살아서 외국 식료품 슈퍼가 많다. 거기에서 필리핀 믹스너츠를 사먹었다. 짜다. 내게는 이게 창원의 맛이다.

창원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창원엔 이주노동자가 많이 살아서 외국 식료품 슈퍼가 많다. 거기에서 필리핀 믹스너츠를 사먹었다. 짜다. 내게는 이게 창원의 맛이다.

반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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