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들었어?” 이것은 앞으로도 반복하고 싶은 말들 중 하나다. 나에게 이 말을 처음 건넨 건 정혜윤이다. 그의 책 <마술 라디오>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방송을 하다가 너무 좋은 말이 나오면 후배를 바라봐. 그리고 이렇게 물어봐. “너도 들었어?” 그럼 후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때는 정말 그것으로 족해. 그럴 수 있기를 바라. 아주 깊게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들을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말할 수만 있다면….’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너무 좋은 말을 들어서 옆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그의 얼굴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 그는 속으로 물었을 것이다. ‘방금 이 이야기. 너도 듣고 있었지? 너도 놀랐어? 너도 이 순간을 잊지 않을 거야?’
인터뷰 현장에서 나도 종종 비슷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내 옆에 선 이들은 주로 동료 사진가들이었다. 그들은 질문하는 나와 대답하는 인터뷰이 사이에서 조심스레 인터뷰의 풍경을 담는다. 대화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채로, 카메라 렌즈가 인터뷰이를 긴장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채로 움직인다. 진정으로 듣고 있는 사진가들만이 그렇게 일한다는 걸 안다. 사진가가 지닌 겸손과 존중의 능력에 힘입어 작가는 인터뷰 원고를 완성한다. 그렇게 만든 책이 <새 마음으로>이다. <새 마음으로>는 나의 아홉 번째 책이고 세 번째 인터뷰집이다. 지금까지 만든 책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물성을 지녔다.
인터뷰할수록 다른 이의 얘기가
나의 이야기처럼 외워진다
남의 이야기들로 내가 가득 찬다
나 스스로를 이렇게 채우고 싶고
그들을 독자 마음속에 그리련다
깊게 들어서 깊게 말하고 싶어서
의도한 만큼 아름다우려면 책을 인쇄하기 전 인쇄소에서 감리를 봐야 한다. 감리를 보는 날엔 인쇄기를 다루는 기장님과의 만남을 생각했다. 인쇄소 기장님 중 귀에 솜털이 없는 분들이 더러 계신다. 마을버스보다 커다랗고 기차보다 시끄러운 인쇄기의 소음으로부터 청력을 보호하고자 수시로 귀마개를 끼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귀마개를 끼워넣으면 귓구멍이 넓어지고 솜털도 사라진다고 한다. 누군가가 그런 소음 속에서 약속을 지키며 일한 결과, 내가 쓴 글은 겨우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온다. 기장님을 인터뷰하고 돌아온 저녁에 나는 배운 것을 받아 적듯이 이렇게 썼다. “감리 직전까지 데이터를 살피고 또 살피던 작가와 편집자와 디자이너들은 인쇄기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잘 부탁드린다고. 무탈히 책이 나오도록 도와달라고.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뭉클해지지만, 아마도 그건 기계를 잘 모르는 이들의 기도일 것이다. 어떤 일이 자기 손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을 때 올리는 게 기도이기도 하니까. 기계를 아는 기장님들은 차분하게 묵묵히 조작할 뿐이다. 그때부터는 모든 게 기장님들의 손에 달렸다.”
내가 직접 하지 않는 노동으로 내 삶이 굴러간다는 사실이 자주 새삼스럽다. 오랫동안 어떤 일을 해온 어른들을 인터뷰한 것은 그래서다. 내 생활 반경 안쪽만 살펴봐도 그런 어른은 여러 명이었다. 수선집 사장님, 아파트 계단 청소노동자, 응급실 청소노동자, 농업인, 인쇄소 기장님, 공장의 경리 선생님…. 누구의 주변에나 있을 법한 노동자인 동시에 유일무이한 개인인 그들을 ‘이웃 어른’으로 소개하고 싶었다. 모두 책에 등장하는 경험이 처음인 인물들이다. 자신같이 평범한 사람이 책에 나와도 되냐고 물었던 인물들이다. 그런 어른들의 일과 삶에 대해 듣고 인터뷰집을 만든 뒤 책을 알리러 이곳 저곳을 다닌다. 이때의 마음은 에세이집을 홍보할 때와는 어딘가 다르다. 나는 나의 에세이집이 갈수록 내게서 멀어지기를 바라며 내 얘기를 한다. 내가 나를 반복하는 게 지겹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만난 이들에 관한 책을 소개할 때에는 조금 더 열렬하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 자세히 들었으니까. “한 번은, 농사 지으시는 인숙씨의 오이 하우스에 크게 불이 났대요. 다음주면 수확할 수 있는 오이들 수백개가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데, 그게 다 타버린 거예요. 인숙씨는 도저히 힘이 안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대요. 그때 동네 사람들이 다 찾아와서 인숙씨한테 거듭 말했대요. 용기 잃지 마세요. 용기 잃지 마세요…. 어떤 분들은 몇 만원씩 든 돈봉투를 쥐여주시고, 어떤 분들은 하우스 보수를 도와주셨대요. 그래서 인숙씨가 누워 있을 수가 없었대요.”
그 일을 같이 겪지 않았지만 인숙씨의 이웃처럼 그 얘기를 전한다. 이때의 나는 아무도 아닌 동시에 여러 명이다.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다른 이의 이야기가 내 얘기처럼 외워진다. 남의 이야기들로 내가 가득 찬다. 나는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채우고 싶다. 나 아닌 얼굴들을 독자의 마음속에 그리고 싶다. 그건 계속해서 깊게 듣고 싶다는 의미다. 깊게 들어서 깊게 말하고 싶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