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학 연구자의 난민 존재에 대한 사유

난민은 미결정성이 그 특징이다. 국가마다 난민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난민법을 글자 그대로 고정시켜 받아들여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유엔 협약상의 ‘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해석의 독점적 권한은 국가에 있다. 난민 입국심사를 표현한 일러스트. 김상민 화백
나는 난민 연구자다. 난민의 현실적 삶에 직접 개입하는 실천적 현장 연구자가 아니라 난민의 존재를 느끼고 언어를 통해 그들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연구자다. 대한민국에서 난민은 출몰에 가까운 일회성 사건으로 이슈화되기 때문에 수용과 거부를 놓고 반발이 있거나 그로 인한 부작용을 남겼을 뿐 사회적 논의를 거친 충분한 태도를 형성할 기회가 없었다. 국가 정책 구상에 난민을 포함시키지 않은 영향도 크다.
2018년 예멘인들의 제주 유입은 연일 뜨거운 감자였다.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제주에서 난민의 방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2년 제주도가 도입한 ‘무사증 제도(비자 없이 30일간 체류)’는 예멘인들이 제주에 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그들은 관광이 아니라 망명을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사회는 크게 당혹해했다.
이때의 기억이 뒷받침되어서인지 2021년 탈레반이 20년 만에 재점령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더기로 발생한 난민들을 두고, “도울 수는 있어도 국내 수용에는 반대한다”는 완곡한 입장 표명에서부터 강력한 반대 여론이 연일 언론 기사의 댓글란을 채웠다. 물론 언론 기사에 달린 댓글이 국민들 전체 의견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특정 지면의 댓글은 동종의 무리를 끌고 다니기 때문에 소수의 이견은 순식간에 악성 댓글에 묻히고 만다. 악성 리플러들은 일관되게 의견을 낸 사람들을 겨냥한다. “그렇게 원하면, 당신 집에 데려가서 보호하시오.”
내가 검색한 난민 주제의 소설들은 인터넷 서점에서 썩 괜찮은 판매지수를 보였으며, 선한 리뷰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성 댓글은 선한 댓글을 밟고 일어서서 여론을 만든다. 또한 다양한 여론이 혼재하는 데도 부정적인 여론만 집중 보도하는 언론 매체의 책임도 있다. 부정적인 생각에 고착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줄 뿐 다른 측면들을 접하고 생각해볼 기회는 주지 않는다. 뉴스 화면의 무슬림들에게서 신경증을 일으킬 정도의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모습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다. 이슬람 전통 교리 샤리아에 담긴 잔혹함이 한국을 덮칠 것 같다는 것이 이유인데, 우리와 똑같은 이유로 자국을 떠나는 사람들을 탈레반과 꼭 같이 바라보는 것은 “같은 풍토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다르지 않다”는 고착된 생각 때문일 것이다.
2021년 정부가 현지에서 한국 정부를 도왔던 아프가니스탄인과 가족들을 수용한 것을 두고 ‘난민’ 표현이 아닌 ‘특별 기여자’임을 강조한 것은 여론의 강력한 반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평가 외에 국제사회에 속한 국가의 대표성으로 완충적인 해결을 위해 우회적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의견이 있었다. 연구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타자’의 문제로, ‘소외’의 주제로 난민을 하위담론에 포함시켜 논의해왔지만 전면적으로 다루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2021년 8월 국내에 입국한 아프가니스탄인들. 정부는 이들에게 ‘난민’이 아닌 ‘특별기여자’ 자격을 부여했는데, 이를 두고 난민 혐오 여론을 설득하는 대신 피해갔다는 비판도 나왔다. 공항사진기자단
‘난민 신분’이라는 말이 있지만 난민은 미결정성이 그 특징이다. 국가마다 난민법을 해석법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난민법을 성문법처럼 글자 그대로 고정시켜 받아들이기도 한다. 난민법 정의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한 때 아일란 쿠르디(Alan Kurdi)의 사진 한 장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2015년 시리아 내전을 피해 유럽으로 탈출하려다 터키 해변에서 숨진 3세 아기였다. 사진은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난민 수용에 나서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물론 그 영향력은 한 달 이상 가지 않았다. 최근, 실제로는 목숨의 위협보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아일란의 아버지가 시리아를 떠나 캐나다로 가려고 했으며, 난민 인정이 어려워 보트 입국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경향신문 2021년 9월15일자). 아일란으로 인해 각국의 국정이 바뀌었으나, 난민 조건과는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다. 난민법이 ‘법’인 만큼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달리 개인이 처한 각기 다른 조건들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가난과 폭력의 희생자로 난민의 이미지가 생산되어왔으나 누구도 영원히 난민일 필요가 없으며, 누구도 결코 난민이 안 될 것이라고 정해진 바 없다. 다만, 난민의 상태가 장기화할 때 그것만큼 더 결정적인 수식어도 없다. 난민의 이미지에는 전쟁과 가난, 이별, 후진국이 자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집, 지역, 국가가 재난이나 위험에 처하여 거주지를 잃은 사람들이다. 정확히는 도망치지 못해 제자리에서 죽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기 위해 타 국가로 떠나 망명을 신청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제자리에서 죽기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곳을 찾아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난민은 지리적으로 가장 먼 단어로 부각된다. 사람들은 예멘이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먼 나라 사람들이 왜 굳이 한국까지 오는지 묻는다. 난민이라는 단어는 한국 역사의 ‘피란민’을 연상시키지만 여전히 이질적이다. 특정 국가 또는 특정 종교(특히 이슬람교)에만 한정된 집단 전체를 일컫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부여한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권리는 국가 내에서 사회적으로 문제화되는 빈부, 성차, 차별 ‘옆’에 또 하나의 문제성으로 기입되어야 한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에서 합의로도 동의로도 환원될 수 없고, 기존 공동체의 유대 바깥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요구를 이야기하면서, 타자의 삶, 아니 그 모든 타자의 삶들과 나 자신의 삶, 즉 어떤 국가적 소속이라든가 공동체적 소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나의 삶 사이의 관련성을 주장한다. 타자의 삶이란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그 어떤 감각이 됐든 사회성으로부터 오며, 사회적 세계 안에서 구성되는, 그리고 사회적 세계에 의해 구성되는 타자의 세계에 이미 처음부터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이 공간적으로 나와 근거리에 접근할 때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불편 또는 해악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먼저 든다. 좋다고, 또는 좋은 사람이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나 나름대로의 확신이 들지 않는 한 가까이 하는 데는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시간이 걸린다. 처음 보는 사물, 예를 들면 기계의 경우도 낯설고 불편한 시간을 거친다. 적어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물일 경우, 이미 호감이 생성된 상태다. 사람 또한 내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호감을 준다면, 말을 걸어보는 용기를 갖게 된다. 범죄 용의자라도 외모가 잘 생겼으면 형량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이 실험 결과에서 사람들은 외모가 중요하다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정확히는 스스로 제대로 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

2021년 12월16일(현지시간) 영국 도버해협을 건너 국경수비대선을 타고 도버항으로 들어오고 있는 이민자들. 로이터 연합뉴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말처럼 “아프가니스탄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아시아인은 중국인으로서, 일본인으로서,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뭉뚱그려놓은 아시아인 전체로서 유럽 또는 미국 사회에서 차별 당하기 일쑤다. 철학자 세일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가 <타자의 권리>에서 강조했듯이, 비인격적이고 제도적인 책임 사이를 끊임없이 매개시켜야 하며, 우리 정치체제의 움직임을 타자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와 다른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에 나서야 하며, 이를 통해 도덕적 보편성이 특수성이나 법률 또는 기능성으로 와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설가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가 쓴 <최고의 사파리>(The Ultimate Safari, 1989)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나딘 고디머는 백인이면서 평생 남아프리카의 역사를 써낸 작가이다. 흑인과 아파르트헤이트가 주된 주제였다. 백인 작가로서 흑인에게 목소리를 부여했으나 백인 비평가들과 흑인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백인은 결코 흑인의 정체성에 대해 쓸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소설에서 어린 소녀 화자는 그런 역사와 상관없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묘사한다. 노상강도들이 마을의 모든 집을 뒤져 약탈해갔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라졌다. 집에 남아있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기쁠 지경이었다. “엄마가 없는, 배고픈 곳으로부터 멀리 가고 싶었다.” 이것이 어린 소녀의 솔직한 마음이다. <최고의 사파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인접한 모잠비크 내전(1977-1992)을 원인으로, 정주지에서 쫓겨난 상황에 처한 일가족이 아프리카 최대의 공원 크루거 파크(Kruger Park)를 통과해서 남아프리카의 난민캠프로 가는 여정을 그린다. 크루거 파크는 원시 자연세계를 즐기러온 백인들에게 최고로 ‘좋은’ 사파리를 선사하는 반면, 정주지를 피해 불가피한 사파리를 경험하게 된 소녀 일행에게는 롭 닉슨(Rob Nixon)이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에서도 지적한 바 있듯이, 인간적 고난과 그에 수반하는 생태적 재앙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최고로 ‘나쁜’ 곳이다. 백인들의 사파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소리를 내어서도, 불을 피워서도, 몸을 일으켜 걸을 수도 없다. 출발 전 이미 부모를 잃은 소녀와 할아버지와 할머니, 오빠,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원숭이처럼 매달린 남동생, 할머니의 등에 업힌 아기가 일가족이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하고 크루거 파크를 이동하는 중에 실종된 할아버지를 찾는 것조차 포기해야 하는 여정은 난민 처지의 취약한 이동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녀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는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지웠지만 그만큼 인간의 조건을 날것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를 얼어붙게 만든다.
<최고의 사파리>는 어떤 호소와 애원 없이 독자에게 말걸기를 한다. 물론 독자 스스로 발을 내디뎌 소설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 풍경에서 주인공(화자)과 동행하면서 질문하고 해답을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을 소환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번역활동을 돕고 활성화하는 일도 필요하다. 202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탄자니아 출신의 압둘라자크 구르나(Abdulrazak Gurnah)는 1960년대 후반 난민으로 영국에 도착했다. 그의 정체성답게 “문화와 대륙 간 차이에 놓인 난민의 운명과 식민주의의 영향을 단호하면서도 연민 어린 시선으로 통찰했다”고 스웨덴 한림원은 평가했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수상이 전해지자마자 번역되곤 하던 풍조가 사라진 것일까. 그의 소설은 수상이 전해진 10월 이후 아직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인 만큼 번역 계약 절차가 오래 걸리는 것일 수도 있다. 난민 주제의 책이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으로 출판계가 나서기 꺼리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난민 주제는 어쩌면 시기상조라기보다 얼어붙어버린 주제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이 문학적 자극을 일으킬 수 있으며, 나아가 독자로 하여금 주제의식에 매달리게 할 수도 있다. 마음을 열 것인지는 각자에게 달려있지만, 먼저 그 물꼬를 트는 일은 문학의 힘을 믿는 출판사, 학자, 그리고 번역자들이 맡아야 한다.
※참고문헌
롭 닉슨.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0.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0.
- 문화 많이 본 기사
세일라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외국인, 거류민, 그리고 시민->. 이상훈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8.
경향신문. 한국 난민: ‘돈쭐’과 ‘가짜 난민 반대’ 사이. 2021.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