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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장벽이 안 되는 정치

입력 2022.02.08 03:00

수정 2022.02.0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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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에 고향을 방문했다. 피곤한 몸을 따뜻한 물에 푼 후 어머니께 얼굴에 바를 로션을 달라 했다. 동그랗고 넙적한 황금색통의 뚜껑을 열어 내게 주셨다. 눈길 위 발자국처럼 하얀 로션 위에 어머니의 손가락 흔적들이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미장원에서 머리를 깎고 나면 듬뿍 발라주던 로션 냄새와 닮았다. 손가락으로 로션을 찍어 얼굴에 바르면서 어디서 만든 건지 궁금했다. 로션 통에는 영어만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연신 좋은 로션이라며 스킨도 필요 없이 이거 하나만 바르면 된다고 말했다. 귀로는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눈으로는 로션과 뚜껑을 빠르게 훑고 있는데 익숙한 단어를 발견했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BODYLOTION.’ 순간 나도 모르게 “이건 보디로션이에요. 얼굴이 아니라 몸에 바르는 거예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도 살짝 웃었다. 말을 뱉고 후회했다. 어머니가 보디로션은 몸에 발라야 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익숙하게 사용하는 영어가 누군가에게는 읽을 수 없는 ‘꼬부랑 글씨’다. 최근 사랑스러운 열 살 조카가 할머니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려고 많은 시도를 했다 포기했다고 들었다. 사실 어머니에겐 재잘재잘되는 똑똑한 손녀를 보는 재미만 있으면 됐고, 보디로션이든 ‘BODYLOTION’이든 얼굴에 발라서 피부에 문제가 없으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언어가 삶의 장벽이 될 때다. 나 역시 배달하면서 영어간판을 한글로 적거나, 외래어 간판을 영어로 적어서 주문한 가게 문 앞에서 헤맨 경우가 종종 있다. 창피해서 짐짓 헤매지 않은 척하지만, 사실 부끄러움은 부차적인 문제다. 어려운 영어로 적힌 의학용어로는 나의 몸 상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자녀가 사는 영어 이름 아파트 때문에 입구 앞에서 서성이는 어르신, 영어간판을 읽을 수 없는 새터민에게도 언어는 큰 난관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윤석열 후보가 ‘RE100’이 뭔지 모른다 했다가 비판과 조롱을 당했다.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이 기후위기 문제에 대한 준비가 안 된 건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국민들 중 RE100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RE가 Renewable Energy의 약자이고, Renewable이 ‘재생’을 뜻한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들은 더 소수일 것이다. 이런 용어는 토론 내내 계속 나왔다. LTV가 Loan to value Ratio, DSR이 Debt Service Ratio의 약자라는 걸 아는 국민도 있지만 이 단어를 처음 듣는 국민도 있다. 한자를 모르면 세상을 읽을 수 없었던 시대로의 후퇴를 바라지 않는다면 지적·문화적 차이에 따른 정보격차 문제를 윤석열의 무지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해법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 주권자의 판단을 받는 게 정당과 정치인의 역할이다. 정치인들이 지식은 어렵게 익히고 말과 글은 쉽게 해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도 RE100이라는 단어를 안다고 기후위기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BODYLOTION을 읽을 수 없어도 얼굴에 맞으면 찍어 바르듯이 RE100이든 뭐든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정책과 비전을 가진 정치인을 찍는 게 국민에겐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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