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의 백기완 선생. 이상훈 기자
“힘들고 외롭고 가장 절박했을 때 선생님이 찾아주셨습니다. ‘노동자는 단결해야 해, 그래야 이길 수 있어. 단결해서 지금처럼 싸우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자본가놈들과 싸울 때, 어용노조와 싸울 때 물러서지 않는 배짱을 가지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 고 백기완 선생의 1주기를 추모하는 노동자·환경운동가·시민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추상 같던 육성, 거리의 노동자들과 어깨를 겯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던 이들은 고인 덕분에 외롭고 막막했던 싸움을 버텼다고 했다.
이들은 이날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창립보고 행사에서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초대 재단 이사장을 맡은 신학철씨는 “고인의 빈자리를 백기완 정신을 계승해 실천하겠다는 버선발로 채운다면 노나메기 벗나래(세상)는 곧 현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 백기완 선생 1주기를 앞두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의 출범 기자회견이 열렸다. 재단은 백기완 선생 추모사업,백기완 선생 정신계승과 사상 연구, 백기완문화재등 문화활동, 노동투쟁 사업 연대활동을 추진한다. 우철훈 선임기자
재단은 정관에 ‘노나메기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내 평생의 뜻을 후세대들이 잘 이어받아주기를 바란다”는 유지에 따라 추모사업과 각 투쟁단위들과의 연대사업, 연구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추모사업은 백기완 기념관 운영, 백기완 예술제, 백기완 기록물 유지·관리·보존사업, 평전 등 출판·영상물 제작 등이다. 재단 산하로 고인이 세운 통일문제연구소와 노나메기민중사상연구소 두 곳을 운영한다. 백기완 기념관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통일문제연구소를 새로 단장해 개관한다.
고인과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은 각자의 추억을 소환했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은 “저에겐 백 선생님이 노동교실이었다”며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써주신 ‘김진숙 힘내라’는 말씀대로 힘내서 꼭 복직하겠다”고 말했다. 김미숙 사단법인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힘든 몸을 이끌고 용균이 빈소 앞에서 큰절을 올리며 (세상이) 거꾸로 되어간다는 것을 알려주셨다”고 했고,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저항의 깃발을 민주노총이 가장 앞장서서 들겠다”고 했다.
고인의 장녀인 백원담 재단 이사는 “나라는 엉망진창이고 대다수 민중은 삶이 피폐해졌다”며 “생전에 계셨더라면 호통치시느라 목이 다 쉬셨을 텐데, 이제는 저희가 그 길을 따라 함께 버선발이 되어 나설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권영길 전 의원은 노동자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계속되는 현실에 대해 “희망이 되어야 할 정치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옥죄고 있다”며 “일갈하시는 백 선생님이 그립다”고 말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삶의 과정에서 백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다. 사상의 은사같은 분”이라고 회고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1심 선고를 하루 앞둔 김수억 전 금속노조 기아차비정규직지회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특별결의문도 채택됐다. 검찰은 문재인 정부에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도심 점거농성과 도로행진을 한 혐의(집회시위법 위반·일반교통방해·특수건조물침입)로 기소된 김 전 지회장에게 징역 5년을 구형한 터다. 재단은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했고, 구명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현장에서 박수로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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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인 15일에는 경기 남양주 마석의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고인의 추도식이 열리고, 추모산문집 <백기완이 없는 거리에서>도 출간된다. 19일에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백 선생 추모 및 투쟁 결의대회’가 열린다. 추모전시회인 <백기완을 사모하는 화가들 18인전>의 1차 전시는 2월16일부터 3월2일까지, 2차 전시는 3월3일부터 3월17일까지 각각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열린다.
고인은 투병 끝에 지난해 2월15일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민 운동을 시작했고, 1960년 4·19 혁명 이후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다가 1974년 긴급조치 1호 첫 위반 사례로 체포됐다. 1987년과 1992년 대선에는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했고, 최근에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김용균 노동자 사망 등 굵직한 현안마다 목소리를 냈다. 민중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된 시 <묏비나리>를 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