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선생(1932~2021)은 정말이지 특별했다. 젊은 시절의 그는 잘났다고 한다. 1980년대 말에 처음 뵀을 때, 범접할 수 없는 풍모가 매력을 넘어 매혹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 1주기를 맞이하여 선생의 삶에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어떤 위대함이 묻어난다. 그의 빈자리가 견딜 수 없는 섭섭함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하지만, 선생의 뜻을 잇고 실천에 옮기자는 ‘노나메기 재단’의 발족에 즈음하여 그 뜻을 우리의 현실에 견줘 가늠해보자.

최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먼저 선생의 삶의 궤적을 짚어보자. 그는 황해도 은율의 구월산 자락에서 500년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독립운동으로 가산이 몰락하여 가난한 어린 시절을 살았다. 아버지는 신식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선생은 초등학교를 고향에서 졸업하고 해방 직후 서울로 왔음에도 더 이상의 제도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10대 후반 독학 중에 집안과 인연을 가진 백범 김구를 만났고, 부산 피란 중에 군복무를 마쳤다. 전쟁으로 분단이 굳어졌고, 그의 부모와 형제는 반반씩 나뉘어 이산가족이 됐다. 돌이켜 볼 때, 선생의 사회·문화적 자산과 제도교육의 결손 사이의 비대칭은 동년배의 선각자들과 비교하여 매우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이로써 역설적으로 전통 및 민중과의 공감대를 그야말로 삶 속에서 이루는 기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다. 아울러 가족 구성원의 분단이라는 아픔은 통일이라는 지향을 세워주었다.
선생은 종전 후 상경하면서 도시빈민운동, 농촌운동 등을 벌이면서 운동가로서 입신하였다. 당시 운동의 내용은 계몽의 차원을 넘지 못했지만, 민중적 지향은 드문 면모였다. 그가 사회·정치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이며,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장준하와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군부독재에 맞서 목숨을 건 장기투쟁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주목할 것은 그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민주화운동에 그치지 않고 통일운동, 노동운동, 문화운동 등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그가 그것을 민중미학에 입각하여 시, 이야기, 시나리오, 우리말 지킴이 등의 예술 행위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그가 전두환의 신군부에 맞서 사선을 넘나들면서 이룩한 문학적 성취는 저항문학의 차원을 넘는 영웅적 거사였다. 선생의 ‘불쌈’은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 민중후보와 진보진영 독자후보로 출마한 뒤에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신자유주의와 부패정권에 맞서는 잇단 투쟁에서 거리싸움, 강연, 저술 등을 통해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철거민, 여성노동자, 세월호 유가족, 뭇 약자들의 든든한 뒷배 구실을 하였다. 선생은 이렇게 80줄에도 늙지 않았고, 끝내 죽어서도 새로운 삶을 열고자 했다.
선생이 살았던 시기는 물리적으로는 한 세기가 채 못 되지만, 문명사적으로는 200년이 넘는 크기를 가진다. 산업문명이라는 세계사의 잣대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선생의 시간대에 우리 사회는 ‘식민지’에서 ‘후진국’으로, 급기야는 ‘선진국’으로, 그러니까 세계체제론의 어법을 빌리면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끝내 ‘중심부’로 진입했다. 이런 변신은 전 지구적으로 최초이자 적어도 현재까지는 유일하며, ‘압축근대화’가 끌어모은 숱한 모순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외면할 수 없는 성취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현기증 나는 변화의 크기와 깊이를 아직 측량할 길 없으며, 그렇기에 그것을 살아낸 우리 또래는 그것만으로도 인간문화재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생은 단지 살아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싸우고 어우르고 길들이려고 했다. 우리 현대사를 세단뛰기로 넘은 이로는 선생이 유일하다고 감히 주장한다.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먼저 선생이 필생의 화두로 삼았던 ‘통일’의 넉넉한 품새를 꼽을 만하다. “해방이란 말이 있지. 해방이란 자유야. 사람의 자유, 목숨의 자유, 자연의 자유야, 이런 자유를 온 사회, 온 지구적으로 누리는 게 통일이야.” 외국 한번 가본 적이 없는 선생이 우주적 상상력을 발동한다. 이는 전통과의 소통이라는 뒷배가 없었다면 가능할 수 없는 경지이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들춰봐야 할 지침서란 이제 없다. 일상의 구석까지 내면화하여 구조적 폭력을 보이지 않게 하는 자본주의, 모든 것을 사법적 정의로 재단하여 결국 강자의 손을 들어주는 절차적 민주주의, 우리의 상상력을 차단하는 투명막들이다. 정녕 선생의 자취를 돌아봐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