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화폐는 공적화폐와 민간화폐 두 가지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중앙은행 화폐, 즉 현금이 공적화폐라면, 은행예금은 민간화폐이다. 선진국들의 경우 화폐(통화)의 95% 이상이 예금화폐이다. 중앙은행 화폐는 한 국가 내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거래에서 계산단위로 이용되며, 통화시스템의 기준(앵커)을 제공한다. 예금화폐는 거래의 지불수단이나 가치저장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지만, 그에 대한 신뢰는 예금화폐가 언제든지 중앙은행 화폐로 교환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공공의 믿음에 달려있다. 즉 은행의 부채인 예금을 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으로 바꿔준다는, 정부의 신뢰성 있는 약속이 현대 금융시스템의 안정적 작동을 위한 제도적 기초이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그런데 2009년 비트코인의 발행을 시작으로 다양한 암호자산 또는 암호화폐가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금융시스템의 작동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의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암호자산은 단순히 거래 가능한 새로운 금융상품의 등장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지불수단의 지위를 얻고자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무릇 어떤 지불수단이 보편적으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계산단위를 기준으로 안정적 가치를 가져야 하는 법이다. 2015년에 처음 도입된 스테이블코인이 법정화폐와 일대일 교환을 약속하는 것도 가치안정성을 담보로 지불수단의 지위를 얻기 위함이다. 2021년 기준으로 전 세계 암호자산의 시가총액은 2조5000억달러, 그중 스테이블코인은 1200억달러에 이른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의 거래량은 이미 다른 모든 암호자산의 거래량을 능가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암호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 몇 가지 상대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디지털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일상에 더 잘 통합되어 있다. 특히 국경 간 거래에서 더 빠르고 저렴하다. 디지털화된 다양한 자산들이 블록체인망 위에서 이동하면, 복잡한 결제 인프라가 없이도 끊김 없는 자동화된 결제가 가능하다. 또한 거래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실시간 결제가 용이하다 등등.
반면에 민간이 발행하는 지불수단 또는 화폐가 직면하는 여러 리스크에 동일하게 노출된다. 예컨대 소비자의 요구에 의해 상환을 해주기 위해서는 보유자산을 적기에 매각할 수 있어야 하는 유동성리스크, 암호화폐사업자가 파산하는 디폴트리스크, 암호화폐 청구권이 외국화폐로 평가되는 경우 환율변동에 따라 가치가 급락하는 환율리스크 등등. 이러한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암호화폐 사업자의 보유자산을 고유동성자산으로 제한하거나 내부통제나 공시 강화 등 법률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는 소위 인출요구쇄도 위험(run risk)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암호화폐의 제도화 여부 및 그 구체적 방안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효율성과 리스크 양 측면 간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스테이블코인 사업자에게 은행과 유사한 예금보호제도 가입이나 정리회생제도 도입 더 나아가 중앙은행 준비금에 대한 접근 허용 등과 같은 금융안전망을 제공하는 방안이 제기되는 것도 이러한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그에 걸맞은 건전성 규제나 각종 내부통제, 공시의무 등도 동시에 부과되어야 할 것이다.
암호화폐의 제도화는 현대 금융시스템의 영혼을 바꿀 수도 있는 일이기에 좀 더 깊이 고려해야 할 게 있다. 무엇보다 암호화폐의 제도화가 은행화폐의 자금중개기능에 미치는 영향 또는 탈중개화가 신용의 공급량과 그 가격 그리고 은행시스템의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만일 예금화폐의 암호화폐로의 전환이 은행을 통한 신용공급의 축소와 대출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유사시 유동성리스크를 확대시킨다면, 금융시스템의 효율적 작동을 저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화폐시스템을 설계할 때 암호화폐, 은행화폐 그리고 CBDC(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 3자의 관계와 기능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고 철저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