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생명의 세계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경칩 무렵부터 시작된 산불이 백두대간을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온갖 생명의 피울음과 한숨뿐이다. 절망과 고통의 먹구름은 푸른 하늘을 가린 연기와 재보다 한결 더 짙다. 타버린 집과 조상의 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짐승들의 죽음, 그리고 결삭은 땅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록빛 새싹을 밀어 올리려던 찰나 화마에 삼켜져 재가 된 식물들의 신음소리가 아프게 다가온다. 메숲지던 숲이 어찌하여 이렇게 황량하게 변하고 말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서 또 다른 숲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안다. 생명은 그처럼 장엄하다. 절망의 수렁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한 이들이 내미는 손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승부는 언제나 잔인하다. 한쪽에서 승자의 노랫소리가 낭자할 때 다른 쪽에서 패자들은 눈물을 삼킨다. 함부로 쏟아냈던 말들이 우리 삶의 자리를 어지럽히고 있다. 쉽게 거둬들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또 다른 갈등과 증오의 불꽃으로 변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주불을 잡고 나면 잔불 정리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처럼 이제는 함께 우리 삶의 자리를 깨끗이 정리해야 할 때이다.

어제는 후쿠시마 핵사고가 일어난 지 1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일본 동북 지방을 휩쓸었던 쓰나미로 전력 공급이 제때에 이뤄지지 않자 냉각수 공급이 끊겼고 방호벽과 핵 연료봉이 녹아내리면서 방사능이 유출됐다.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고, 방사능 폐기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생태계를 교란했다. 유전자 변이로 인해 기형적인 동물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후쿠시마 핵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그 피해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 사고가 일어난 이듬해에 일본 음악가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일 생명평화 콘서트’를 열었다. 그들은 후쿠시마의 참상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열기 위해 세계 각지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과 동행한 사진작가 오가와 데쓰시의 작품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놀랍게도 그는 후쿠시마의 참상을 담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 살던 어린이들의 해맑은 모습과 지천으로 핀 풀꽃을 찍었다.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주고 싶다고 말했다. 슬픈 아름다움이었다.

일본의 생물학자인 가와바타 구니후미는 <생명의 교실>이라는 책에서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근처를 흐르는 모토야스강의 하구 옆을 지나다가, 간석지에 많은 꽃발게가 모여 일제히 체조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꽃발게의 그 행동은 일종의 ‘구애행동’인데 그 리드미컬한 몸짓이 장관이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가와바타는 문득 게들이 저렇게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구나. 어떤 생물에게도 살아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구나. 존재의 근원은 ‘즐거움’이겠구나. 그러니까 누구든 대우주, 대자연이 협연하는 ‘즐거움’이라는 심포니를 자신 안에, 타자 속에, 모든 존재 속에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거구나.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미동하지 않는 진실한 생명의 세계가 존재하는 거구나.”

생명의 장엄함에 대한 인식이 생물학자를 시적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추해보여도 그 이면에 가려진 아름다움을 보는 이들이 있다. 그 아름다움에 매혹된 이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보통 사람들은 산불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황량함만 보지만 그들은 잿더미를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에 주목한다. 그들은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핵 전쟁이나 원전사고가 미화될 수는 없다.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참상의 현장을 방문했던 체험을 들려준다. 그는 모든 것이 회색 재로 덮인 세상을 상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꽃이 만발한 초원과 봄 향기를 내뿜는 녹음 짙은 숲과 만났다. 모든 것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알렉시예비치는 그 아름다움이 두려움과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죽음의 낯선 얼굴이었다. 그곳에서 자라는 꽃은 꺾으면 안 되고, 풀밭에 앉아도 안 되고, 나무에 기어올라도 안 되고, 그 땅에 집을 짓고 살 수도 없었다. 핵 발전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핵이 잠재적으로 만들어내는 디스토피아적 현실도 외면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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