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 저작의 원래 제목은 ‘두려움이라는 군주’였다. 두려움이라는 절대 군주의 지배에 휘둘릴 때, 사람들은 증오, 분노, 혐오에 사로잡힌다. 난민들이 성범죄를 저지르고 여성의 안전을 위협할까봐 두렵다, 외국인이 흥청망청 이용해서 건강보험 재정이 파탄날 것이 두렵다, 위험천만한 페미니즘이 독버섯처럼 퍼지고 저지르지도 않은 성범죄로 처벌받을 것이 두렵다. 큰일이다. 추방하고 억누르고 통제해야 한다. 그것도 가급적 빨리. 위험이 임박했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두려움이라는 군주에 지배당하고, 분노에 불이 붙었으니까.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두려움과 분노, 혐오 같은 감정은 본능적으로 내재하거나 자연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과 문화, 사회적 학습에 의해 지속적으로 ‘구성’된다. 예컨대 흑인 청소년이 들고 있는 검정 비닐봉지를 오인하여 선제적으로 총격을 가하는 미국 백인 경찰의 두려움은 미국 사회 고유의 인종적 편견, 무의식적 학습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에서 검정 비닐봉지에 놀라 총을 쏠 경찰이 어디 있겠나.
30분 넘게 화장실에 몰래 숨어 있다가 남성 6명을 지나 보내고 초면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볼 것인가, 망상에 사로잡힌 환자의 우발적 행동으로 볼 것인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신질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한들, 여성이 나를 무시한다는 망상의 내용, 그래서 복수해야 한다는 분노 자체는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의 망상증 환자가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분노할 수는 없는 이치와 같다. 젠더폭력 가해자의 상당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여성이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났다고 이야기한다. 현실에서 나를 무시하는 이는 대개 나보다 힘이 센 남성이지만, 분노의 대상은 이들이 아니라 내가 화를 내고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여성이다.
두려움은 위험을 회피하게 함으로써 인류의 생존을 가능케 하지만, 공존과 연대,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촉발하고 분노와 혐오를 부추김으로써 이득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극적 논란거리를 만들어내서 주목을 받고, 이러한 주목은 오늘날 돈이 된다. 클릭 수와 댓글, ‘좋아요’는 단지 기분을 으쓱하게 만들어주는 사회적 인정 수단을 넘어선 지 오래다. 마르크스가 깜짝 놀랄 만큼, 혐오는 잘 팔리는 ‘상품’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두려움, 분노, 혐오가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는 오랫동안 ‘지역감정’이라고 점잖게 명명된, 실상은 호남차별주의를 오랫동안 활용해왔다. 그나마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비판 앞에서 강하게 손사래를 치는 정도의 매너는 지켰다면, 이번 선거에서는 그런 가면마저도 벗어던졌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국민통합을 이야기하고,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차이를 찾기 어려울 만큼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인심 좋은 공약들이 넘쳐났던 이전 선거들과 대조된다. 이렇게 국민의 일부를 표적 삼아 공격하고, 분노와 혐오를 수단으로 삼아 반대편의 결집을 도모하는 경우는 없었다. 여성으로서 선거 기간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은 모멸감이었다.
누스바움은 해외 출장 중 트럼프 당선 소식을 듣고 이 책의 집필을 결심했다고 한다. 근심과 불안에 시달리다, 두려움이야말로 현재 미국 사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열쇠라는 ‘행복한 발견’을 하고 나서 이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정도 대인배가 아닌지라 차마 ‘행복’이라는 단어는 못 쓰겠지만, ‘다행’이라는 말은 하고 싶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왜 분노와 혐오를 조장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드러났고, 그에 함께 맞설 수 있는 동료 시민들의 존재 또한 분명하게 확인했으니 말이다. 두려움의 반대편에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