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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농식씨 이야기

입력 2022.03.17 03:00

나는 꽤 오랫동안 ‘설농식’이란 남자의 실체를 찾고 있다. 얼굴도, 사는 곳도, 나이도 모른다. 아니 무엇보다 실존하는 사람인지조차 모르겠다. 사람을 찾거나 알고 싶으면 일단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을 넣고 봐야 한다. 없다. 구글에도, 페이스북에도, 유튜브에도. ‘설 농식품’ 총매출을 알려주는 기사들만 잔뜩 나온다. 단서를 더해보고 싶어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설농식’, 어쩌면 ‘선농식’ ‘설용식’일 수도 있는 남자의 이름 세 글자뿐이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1990년대가 저무는 때엔 세상의 종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주 길에서 전단지를 나눠줬다. 성스러운 화풍의 표지를 펼치면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사진이 있었고 ‘대기근’ ‘멸망’ 같은 단어들이 붉은 글씨로 공포를 조장했다. 단 한 번도 믿은 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자려고 누우면 그들의 모습이 생각나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사람들이 허공에 둥실 떠올라 갈라진 빛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그림, 지하철 역 앞에서 한 노인이 들고 있던 ‘천국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피켓…. 종말이란 개념을 알게 된 어린 나는 매일 밤이 무서웠다. 새벽 한 시, 두 시, 세 시… 불안으로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지면 옆에 누운 할머니도 함께 잠을 설쳤다.

‘설농식 이야기’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됐다. 내가 찾고 싶은 남자 ‘설농식’은 할머니가 나를 재우기 위해 해주던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설농식 이야기는 다소 즉흥적인 구성의 옴니버스 시리즈로 내용을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대개는 마누라를 패고, 자식을 버리는 망나니 같은 남자가 한평생 남을 괴롭히다 결국 천벌을 받는 구조의 이야기였다. 어느 날은 10분 안에 이야기가 끝났지만, 어떤 날은 세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 날은 보통 할머니가 ‘설농식’이 골탕 먹는 행위를 표현하다 웃음이 터졌을 때였다. 할머니는 그렇게 원본을 알 수 없는 ‘설농식씨 이야기’를 멋대로 각색하며 즐거워했다.

할머니의 엄마, 할머니의 삼촌, 할머니의 언니. 나를 재우기 위해 시작한 ‘설농식씨 이야기’엔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의 지인들이 등장했다. 숨바꼭질을 하다 만난 순사, 시장 좌판에서 냉이를 팔던 아기 엄마, 사고로 잃은 할머니의 작은아들과 그의 어린 친구들도 나왔다. 이야기는 시제를 넘나들었고 등장인물들은 가끔 큰불이나 연기처럼 등장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쉴 새 없이 히죽대고 울먹였다. 글을 모르던 할머니의 머릿속은 그렇게 수상하고 몽환적인 장면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잠들지 못하던 어린 나는 그 정신없는 이야기에 불안을 털어낼 수 있었다.

지난 1월 극장에 개봉한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주인공은 ‘잠들지 않는 여자’ 박인순씨다. 다큐멘터리이자 판타지이며 뮤지컬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불규칙한 작품은 미군 기지가 있었던 폐허에서 자신의 기억과 싸우는 기지촌 노년여성 인순씨의 언어와 방식으로 진행된다. 저승사자가 오기 전에 자신을 옭아매는 수많은 기억들에게 복수를 다짐한 그는 섬뜩하지만 아름다운 그림을 부적처럼 그리면서 원한과 악몽에 맞선다.

임신한 나무들과 도깨비는 인순씨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존재들이다. 국가, 시대, 사회로부터 받은 폭력과 억압을 감내하던 여자가 스스로 만든 기이한 환상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고발하는 것이다. 불친절한 제목은 혼란을 야기하지만 나는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래전 할머니가 현실과 꿈을 혼합해 만들어 내던 형체 모를 존재들 덕분이었다. 살아온 인생의 굴곡은 모두 다르지만 꾹 참은 울분이 터져 새어 나오면 그 속에 우리는 같은 모습으로 섞인다. 기억과의 쫓고 쫓기는 싸움 끝에 탄생한 인질이자 장승들. 언제부턴가 나는 그 여자들이 만든 섬뜩하고 으스스한 존재만이 잠들지 못하는 나의 불안을 삼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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