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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콩농사, 콩과 어른의 시간

입력 2022.03.18 03:00

수정 2022.03.1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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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시간은 언제일까.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부모에 대한 연민과 부담감을 동시에 끌어안을 때 어른의 시간을 산다. 입맛으로 아이 어른을 구분하자면, 보통 ‘초딩입맛’이라 부르는 입맛이 있다. 달콤한 맛을 좋아한다는 것이기도 하고 나물 따위엔 입을 안 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른의 입맛은 무엇일까. 내게 어른의 입맛이란 깨송편이 아니라 콩송편에 손이 가는 일이다. 어릴 때는 송편을 뒤적거리면서 기어이 깨송편을 찾아내려 난리를 피웠건만 지금은 달콤한 깨송편이 싫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날씨가 풀리면 풋콩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짜장면 위에 성의 없이 몇 알 던져진 딴딴한 통조림 완두콩 말고, 밥 속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는 그런 완두 말이다. 남녘에서 늦가을에 파종해 겨울 지나 늦봄이 오면 완두를 먹을 수 있다. 밥밑콩이라 하여 밥에 놓아먹는 강낭콩이 나오면 뜨거운 여름의 정점에 서 있을 것이다. 대두라 부르는 흰콩은 두부와 장을 담그고, 콩나물로 기르는 다양한 쓰임이 있어 그나마 국내에서도 많이 길러 먹는 대표 콩이다.

현대의 농업은 수확량이 많고 또 2차, 3차 가공의 영역이 넓은 작물 위주로 농사가 재편된다. 쓰임이 많다 싶으면 국가가 나서서 더 크게,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품종을 만들어 내는데 그중 대두가 있다. 기름과 사료, 가공식품의 기초 재료로 용처가 많은 콩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대규모로 기르고 한국도 대표적인 콩 수입국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입으로 직접 들어가는 용도로는 여전히 직접 길러 먹으려 애를 쓰지만 외국산 콩과 값 차이가 커서 국내산 콩으로 만든 두부와 콩나물은 웃돈을 내야 한다.

잔손이 많이 가는 콩농사는 오래도록 여성 농민들의 농사였고 할머니 농사였다. 기르는 걸로만 끝나지 않고, 잘 여문 콩을 밥상 위에 펼쳐 우선 좋은 콩을 골라 내년 종자로 삼는다. 장명종자인 콩은 잘만 간수하면 몇 년은 싹을 틔울 수 있어, 배곯던 시절에는 구휼을 담당한 귀한 곡식이었다. 종자로 따로 잘 쟁이고 나머지 콩으로는 음식에 요긴하게 쓰고, 콩을 털고 남은 콩대는 중요한 연료로도 쓰였다. 콩은 뿌리에 질소를 고정하는 능력이 있어서 밭가나 논가에 심어 콩도 얻고 농지에 질소도 공급하는 역할도 겸했다. 근래 논가에 심은 콩이 드문 이유로는 논 기계가 들어가는 데 걸리적거리기도 하고 질소비료가 넘쳐나는 시대에 콩으로 비료를 삼을 일도 없어서다. 무엇보다 콩 심고 가꿀 이들이 늙고 힘이 없어서다. 그래도 여전히 할머니들은 조금이라도 콩을 심고 거두는 일을 귀하게 여긴다. 콩이 있어야만 장을 담가 음식의 간을 맞출 수 있고, 식사의 기본 꼴을 갖출 수 있어서다.

팥도 마찬가지다. 팥빙수나 단팥빵 같은 팥이 들어간 음식들 인기가 높아 국내산 팥 수요가 늘었지만 팥 농사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팥은 날짐승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물이어서 심어놔 봤자 피해가 심하고 수확량 자체도 적다. 그래도 할머니들은 팥도 기른다. 그래야만 겨울에 팥죽도 한 번 쑤어먹고 떡고물도 삼을 수 있어서다. 동부도 마찬가지다. 떡에 들어가는 하얀 고물인 동부는 찾는 이가 적어 국가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근래 영광모싯잎송편이 인기를 끌자 영광군에서 국산 동부 재배 사업을 독려하기도 했지만 한번 밀린 농사를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기계화가 더딘 밭작물들은 농민들의 허리와 손에 온전히 매달리는 일이고 오래도록 여성 농민들이 떠맡아 왔다. 벼농사는 기계화 진척이 마무리되었지만 밭농사는 여전히 호미에 매달려 짓는다. 그래도 이름 붙은 날에 막상 콩떡, 팥떡 없으면 섭섭하니 허리 꺾어 농사를 짓는다. 당장이 아니라 미래의 계획으로 들어찬 할머니들의 콩농사. 콩밭 매는 아낙네들이 없다면 콩 송편 한 개도 못 얻어먹고, 끝내 나는 어른의 시간을 맞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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