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미완의 삶, '그 곳'에선 평안한가요? 연여름 소설집 '리시안셔스'

백승찬 기자

리시안셔스

연여름 지음 | 황금가지 | 388쪽 | 1만3800원

연여름의 데뷔 소설집 <리시안셔스>에 실린 ‘비아 패스파인더’는 ‘두 개의 런던’이라는 평행 세계를 설정해 소수자 차별의 문제를 다룬다.

연여름의 데뷔 소설집 <리시안셔스>에 실린 ‘비아 패스파인더’는 ‘두 개의 런던’이라는 평행 세계를 설정해 소수자 차별의 문제를 다룬다.

SF(과학소설)의 장점 중 하나는 사고실험이다. 현 체제가 드러내는 여러가지 모순들을 완전히 새롭게 설정된 체제 속에서 탐구할 수 있다. 리얼리즘 세계관이 조심스럽게 다루는 문제들을 과감하게 뒤틀거나 뒤집어 그려낼 수 있다.

신진 SF 작가 연여름의 첫 소설집 <리시안셔스>에는 이 같은 사고실험의 결과물들이 담겨있다. 반려동물, 성소수자, 장애인, 사이버불링, 팬데믹 같은 소재들이 SF적인 설정 위에 다뤄졌다. 소재와 설정이 어울리지 않아 덜컹거리는 느낌은 거의 없다. 작가의 의도가 뚜렷하면서도 작품 구성이 유기적이며 때로 아련한 서정도 나타난다.

‘비아 패스파인더’는 평행 세계를 소재로 삼았다. 이주민의 후손인 주인공 소난은 런던의 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뮤지션을 꿈꾼다. 소난의 런던은 이주민,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소난의 음악은 영 인기가 없다. 그는 우연히 종업원 탈의실에서 평행 세계의 런던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한다. 또 다른 런던에서 소난은 조금씩 입지를 다지는 뮤지션으로 성장한다. 다만 다른 런던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잔존하는 공간이라는 점이 문제다. 어느날 다른 런던의 펍에서 이민자를 향한 차별 정책에 분노한 테러가 발생한다. 소난은 자신의 런던으로 돌아갈 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두 세계를 오간 소난은 “모든 세계는 완벽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단편에는 다양한 소수자들이 등장한다. 소난의 동생과 다른 런던의 공연기획자 클로이는 장애인이다. 소난과 주변 인물들 역시 대부분 이주민이다. 유모차 대신 유아차, 장애 대신 장해, 부모 대신 보호자라는 어휘를 사용해 주제의식과 연동한다.

[책과 삶]미완의 삶, '그 곳'에선 평안한가요? 연여름 소설집 '리시안셔스'

‘표백’은 대형병원 세탁실과 병실을 배경으로 한다. 세탁실에는 한 명의 인간 관리자와 ‘휴인’이라 불리는 휴머노이드들이 있다. 모래라는 이름의 휴인은 회복을 거부하는 환자 의진의 요청으로 그의 말동무가 된다. 웹진 에디터였던 의진은 온라인에서 만난 일러스트레이터 수림과 친분을 쌓아 작업을 의뢰한다. 그러다가 수림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고, 의진 역시 수림에 대한 비판 대열에 동참한다. 온라인상의 어긋난 ‘연결감’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반면 세탁실에 새로 부임한 인간 관리자 근아는 휴인들과의 연결감 부족으로 힘들어한다. 휴인들은 어떠한 폭언, 열악한 근무 환경도 견디고 개인적 스트레스로 고민하지도 않는다. 오직 완벽한 효율성으로 맡을 일을 처리해내고 관리자에게 상냥한 말로 복종한다. 역설적으로 근아는 어떤 인간적 감정도 전이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불쾌함과 답답함이 쌓여감을 느낀다.

‘시금치 소테’는 자살 생존자 미하 이야기다. 병원에서 갓 퇴원한 미하에게 보호사 정인이 배정된다. 나라에서는 자살 생존자에게 의무적으로 보호사를 1~6개월간 파견해 그의 일상을 돕도록 한다. 이 세계에는 생존자가 또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옵션’이 있다. 보호 기간이 종료된 뒤에도 예후가 좋지 않으면 부정적 사고를 유발하는 기억만 선별해 제거하는 시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미하는 파견된 보호사 정인과 친분을 쌓아가며 과거의 상처를 천천히 돌아본다. 아울러 옵션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한다. 아픈 기억을 삭제하고 안전하게 살아가느냐, 아픈 기억을 안고 혼란한 삶 전체를 받아들이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비인간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탐색하는 건 많은 SF의 장치였다. 표제작 ‘리시안셔스’와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 ‘좀비 보호 구역’ 등이 이러한 부류의 작품이다. 한국 SF어워드 수상작인 ‘리시안셔스’는 ‘반려인간’이 공식화된 세계를 그린다. 이 세계의 ‘인간’은 인공 신체로 기존 신체를 강화하고, 오염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준비하는 존재다. 이 같은 조건에 들지 못한 ‘미등록’은 인간을 보조하도록 선발된 ‘공생인’ 혹은 인간의 ‘반려’가 될 수 있다. 주인공 진은 ‘자가 종료’를 하려다가 우연히 만난 ‘인간’ 규희의 반려가 되고, 안온한 삶을 누린다. 진이 규희 집에서 지켜야 할 유일한 규칙은 “진, 하고 부르면 달려갈 것”뿐이다. 진은 규희에게 어떤 의무도 갖지 않지만, 반려로서의 삶이 마냥 행복하게 마무리된다면 이 소설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는 우주여행선의 승무원인 안드로이드 미레이 이야기다. 미레이는 동면을 선택하지 않은 채 기나긴 여행을 감내하고 구식 커피 그라인더를 사용하는 인간 승객 테이를 관찰한다. 미레이는 테이의 행동에서 ‘즐거운 일’을 감지했다는 사실에 대해 당황해한다. ‘좀비 보호 구역’은 팬데믹을 연상케 하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의 수습 방식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다.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내 인간관계, 특정 대중문화 팬덤의 생태계를 유심히 관찰한 흔적도 곳곳에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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