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회장 선거와 정치적 상상력

<소곤소곤 회장>의 삽화. 책에는 목소리가 작은 어린이가 학급 회장으로 선출되고 나서 어린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이들은 공부 잘하고, 힘세고, 재미있고, 사교성 좋은 회장은 아니지만 다친 박새를 돌볼 줄 아는 소곤소곤 회장 심조영에게서 친구들의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비룡소 제공
초등학생들에게 3월은 ‘선거의 달’
자치조직 구성과 민주주의 배우는 시기
저마다의 이유로 선거에 뛰어든 아이들은
“회장·부회장은 다른 일 하는 것” 깨닫고
개인이 모여 커다란 퍼즐이 되는 것 보고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사람으로 성장
성별·계층 갈등과 무자비한 선거공학 등
현실 정치의 이면을 정밀히 담은 책은
타협하지 않는 아이들 특유의 윤리 그려
초등학교에서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은 선거의 달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이 직접투표로 학급과 학교의 회장단을 선출하는 일은 그저 연례행사가 아니라 자치조직을 구성하며 민주주의를 체득하는 중요한 교육 과정이다. 어른들에게 옛날 ‘반장 선거’는 학생들을 서열화하고 교사의 권위를 대리, 유지하던 수단으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는 투표를 통해 오히려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은 학교 제도의 작동 방식을 내재화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학교가 점차 민주적으로 변하면서 초등학교의 선거 풍경도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학급 회장과 부회장, 학교 부회장은 남녀 동수제로 운영되고 학교 회장만 남녀 구분 없이 한 명을 뽑는다. 2학년부터 시작하는 학급 선거는 너도나도 입후보해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지 발표하고 꿈꾸는 즐거운 축제가 되기도 한다. 올해 선거철(?)에 집 근처 초등학교의 6학년 교실에서는 전에 없이 남녀 회장, 부회장 후보자가 단 한 명씩 등록해 무투표로 당선됐다고 하니, 혹시 활기찬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가 코로나19 때문에 줄어서인지 안타까웠다.

어쩌다 부회장 송미경·위즈덤하우스·2017
‘떠드는 아이들’ 시리즈 1권 <어쩌다 부회장>(송미경·위즈덤하우스·2017)에는 어느 2학년 교실의 선거 풍경이 재미나게 담겨 있다. 늘 엉뚱한 어린이 캐릭터로 어린이 독자에게 해방감을 안기던 작가는 학급 회장 선거 또한 여지없이 뒤집고 과장하며 생기를 불어넣는다. 주인공 유리는, 언니가 자랑스레 벽에 붙인 부회장 임명장을 보며 “교장 선생님이 찍은 도장까지 있는 거 보니 부회장이 되는 건 아주 중요하고 멋진 일 같았다”(<어쩌다 부회장> 11쪽) 생각하고는 선거에 나간다. 처음 하는 선거에 아직 모두들 어리둥절하는 동안 회장은 무투표 당선으로 쉽사리 정해지고 이어 부회장을 뽑을 차례. 그제야 대충 분위기를 짚은 어린이들은 단 두 명을 빼고 모두 후보로 나선다. 우여곡절을 거쳐 몇몇이 최종 후보가 되고 연설하는 장면은 이렇게 그려진다.
“제가 부회장이 되면 우리 모두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삐용삐용.”
아빈이가 말했다.
“삐용삐용 같은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말했다.
“아이들이 저를 기억하게 하려면 필요한 말이에요.”
아빈이가 대답했지만 선생님은 아빈이를 쳐다보지 않았다.(<어쩌다 부회장> 19쪽에서)
당선 전략으로 ‘삐용삐용’이란 의성어를 사용한 게 터무니없이 기발해서 마냥 웃음이 나다가도 묘하게 동의가 된다. 같은 반 친구로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서로 잘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을 각인시킬 무언가를 오직 후보 연설에서 확실히 보여줘야 하지 않나. 어른들의 선거 유세에서도 어퍼컷과 발차기 퍼포먼스가 등장하는 걸 보면 아빈이는 남다른 정치 감각을 타고난 어린이임이 분명하다(선생님은 아빈이를 쳐다보지 않을 게 아니라 눈여겨보셔야 했다). 사실 어린이 회장 선거에서는 흑색선전이나 금품 살포가 있었단 얘기를 들어본 적 없고 오로지 후보자의 공약과 자질이 중요시되니, 공정 선거의 모델로 삼을 만도 하다. 투표 끝에 주인공 유리는 결국 부회장에 당선되고, 어느 날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회장의 역할과 권한에 대해 한바탕 다투던 아이들은 선생님의 권력을 마냥 대리하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데 합의한다. “회장과 부회장은 높거나 낮은 게 아니라 각자 조금 다른 일을 하는 것뿐”(<어쩌다 부회장> 74~75쪽)이라는 점 또한 깨닫는다.
<어쩌다 부회장>이 2학년 ‘아기’들의 학급 회장 선거를 들여다보며 대의제로 주어진 권력의 허실을 꿰뚫었다면 <기호 3번 안석뽕>(진형민·창비·2013)은 6학년 ‘형님’들의 전교 회장 선거로 시야를 확장해 정치적 상상력을 일깨운다. 전교 회장 선거 회의를 할 테니 교실에서 나가달라는 학급 회장의 말에 발끈해 시작된, 안석진의 문덕초 전교 회장 선거 출마. 안석진, 김을하, 조지호는 교문 앞 선거운동 때 담임 선생님이 자기 반 학생들인지 몰라볼 정도로 선생님의 관심 밖에 있던 어린이들이었다. 출마는 얼떨결에 시작됐지만 이들의 지향은 점점 분명해져갔다. 1번 후보의 ‘명품 학교, 1등 학교’ 대신 ‘일등부터 꼴찌까지 다 좋아하는 학교’를 만들자 했고, ‘일등만 사람이냐 꼴찌도 사람이다’를 손팻말 문구로 적었다. 성적으로 줄을 세우자면 당연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더 많고, 더 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대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자기들이 후보로 나서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는 후보를 뽑는, 즉 계층 투표(?)를 배반하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서였다.
석진과 친구들에게 ‘일등’과 ‘꼴찌’는 단지 성적만으로 나뉘는 계층이 아니었다. 이 어린이들에게는 문덕시장이 가정 생계의 터전이다. “어릴 때는 멋모르고 시장을 들락대지만 4학년만 되면 저절로 안 그러게 되”고,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을 써내라 할 때도 그냥 ‘사업’이라고만”(<기호 3번 안석뽕> 33쪽) 쓰는 어린이들이며 그들의 친구이다. 기운차게 선거운동을 하던 석진이지만 방송 연설 때 1번 후보의 엄마가 자식을 응원하러 온 걸 보고는 “나는 공부도 그저 그렇고, 한턱 쏘는 엄마도 없고, 심지어 양복도 안 입었는데”(<기호 3번 안석뽕> 106쪽)라고 움츠러드는 때도 있다. 그러니 문덕초 전교 회장 선거에서의 1번 후보와 3번 후보의 구도는 학교 안에서 어린이들을 알게 모르게 구획하는 여러 선들을 예민하게 포착해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기호 3번 안석뽕 진형민·창비·2013
학교 안 구도는 학교 밖으로까지 확장된다. 문덕시장 바로 옆에 대형 할인마트인 ‘피마트’가 개점하면서 일어난, 부모님의 가게들과 대기업 간 대결은 학교에서의 꼴찌와 일등의 대결과 동일한 구도를 갖는다. 이 동화가 출간된 2013년은 대형 마트의 영업시간과 의무휴업 규제 지침이 줄곧 엎치락뒤치락 바뀌다가 헌법소원까지 청구된 때였다. ‘경제대통령’을 내걸고 집권한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연도이기도 했다. 현실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어쩌면 백전백패 다윗이 지는 싸움이다. 소년 다윗이 돌팔매 하나로 장수 골리앗을 물리치는 건 ‘믿음’의 영역에서나 가능할지 모른다.
현실이니까, 안석진은 선거에서 진다. 하지만 강당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며 새로운 세상을 본다. “단상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아주 달랐다. 작은 퍼즐 조각들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가 어느 순간 큰 그림으로 완성되는 걸 내려다보는 느낌이랄까. 조각조각인 우리들이 다 모이면 이런 그림이 되는구나, 하는 걸 나는 난생처음 깨달았다.”(<기호 3번 안석뽕> 129쪽) 누구에게나 똑같은 한 표와, 그 한 표가 모여 만들어내는 세상이 거기에 있었다. 한 사람은 고작 하나의 퍼즐 조각에 불과할 뿐이지만 다른 조각과 모서리를 맞추는 역동 가운데 다같이 어떤 그림을 그리려 하느냐에 따라 전체 그림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석진은 자신이 무엇을 꿈꾸어 왔는지를 명확히 확인한다. 하나의 조각만 필요하다는 학교에서 졸지에 쓸모없는 조각들이 되어버린 석진과 친구들은 모든 조각이 모여 만들어내는 학교의 새 그림을 그렸다. 밑그림이 이미 다 그려진 퍼즐 판이 시키는 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한구석에 자리 잡길 거부했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인간으로 성장한 것이다. 친구 지호가 자기보다 전교 회장에 더 적합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석진은 이번 선거에서는 패했지만 다음 선거에 지호를 후보로 해서 “진짜로 뭔가 한번 보여주자”고 다짐한다. 이들에게 선거가 단번에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정치적 인간의 탄생이자 정치적 상상력의 발견이었음을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2013년 <기호 3번 안석뽕>이 그려낸 일등 대 꼴찌, 강자 대 약자의 구도는 2020년 출간된 <승리의 비밀>(주애령·바람의 아이들·2020)에 와서는 당대의 정치적 의제를 반영하며 또 다른 구도로 전환된다. <승리의 비밀>에서 1번 후보는 ‘남자’ 구용진이고, 2번 후보는 ‘여자’ 박정민이다. 3년 전부터 출마자가 없어 공석이던 충영초 전교 회장 자리에 먼저 출사표를 낸 건 박정민이었다. 사촌 오빠가 대학 총학생회장이 된 게 멋있어 보여 나섰고, 올해도 출마자가 없어 당연히 자신이 당선될 거라 예상했지만 난데없이 구용진과 이유림 두 후보가 등장한다. 그중 구용진이 자신의 출마 이유를 ‘남자라서’라고 밝히고, 태권도장 친구들과 정문 유세를 시작하고부터 충영초 전교 회장 선거는 남성 대 여성의 구도가 된다. 2013년 강자 대 약자의 구도는,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친 2020년에 이르러 남성 대 여성의 구도로 전환됐다.

승리의 비밀 주애령·바람의 아이들·2020
정민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에 골몰하다 인터넷에서 ‘Secretofvictory’란 대화명의 정치 컨설턴트를 만나고, 그가 알려주는 선거 전략을 행동으로 하나씩 옮겨나간다. 정민과 정치 컨설턴트의 카카오톡 대화라는 형식은 공약, 유세, 연설, 상대 후보자와 유권자 분석 등과 관련한 선거공학을 정밀하고 명료하게 전한다. 선거공학의 영역으로 편입된 전교 회장 선거에는 기존 남성 대 여성의 구도에 현실 정치가 한 겹 더해진다. 3번 후보인 이유림이 자신의 출마 이유에 대해 “남자는 남자 후보 찍고 여자는 여자 후보 찍는 것 말고 선택의 기회가 없잖아. 애들이 너랑 나 둘 중에서도 생각해 보게 하고 싶었어”(<승리의 비밀> 155쪽)라고 밝히는 장면이나, 용진과 정민의 박빙을 예상한 ‘Secretofvictory’가 유림의 후보 사퇴를 요구하라고 정민에게 조언하는 장면은 현실 정치에서 반복되어온 후보 단일화 요구와 소수 정당의 정치적 입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정민은 유림을 만나지만 사퇴를 종용하지는 않는다. 정민은 여기에서 ‘Secretofvictory’의 조언을 유일하게 거부한다). <승리의 비밀>은 이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선거공학을 거침없이 말하는 가운데서도 결국 민주주의는 승리하며 역사는 진보할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용진에게 단 한 표로 지고 허탈해하는 정민에게 유림은 말한다. “내 표랑 네 표랑 합치면 334표나 된다고. 우리가 구용진을 꺾은 거야.”(<승리의 비밀> 192쪽)

소곤소곤 회장 강인송·비룡소·2021
최근 출간된 <소곤소곤 회장>(강인송·비룡소·2021)은 앞서 본 책들과 전혀 다른 목소리로 회장 선거 이야기를 들려준다. 목소리가 작은 심조영이 학급 회장으로 선출되고 나서 어린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조곤조곤 속삭인다. 공부 잘하고, 잘살고, 힘세고, 재미있고, 말 잘하고, 사교성 좋은 회장은 아니지만 다친 박새를 돌볼 줄 아는 심조영 회장에게 친구들은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은 여전히 시끄럽고, 조영이는 여전히 조용히 말”했기에 달라진 건 없는데 “아이들은 조영이의 작은 목소리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소곤소곤 회장> 76쪽)다. 목소리 작은 조영이가 친구들에게 일방적으로 배려되고 수용되어야 할 존재로 그려지지 않았기에, 가장 작은 존재부터 돌보는 조영이의 마음은 비로소 미래의 리더십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기호 3번 안석뽕>과 <승리의 비밀>에서 보았듯 동화는, 동화에 대한 흔한 편견과 달리 현실 세계의 일들을 정밀하게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롯한 이상을 꿈꿀 수 있는 이유는 현실을 제대로 모를 만큼 순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냉소하거나 비관하며 현실에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특유의 윤리는 바로 어린이가 지닌 윤리에 근거한다. 어른 작가가 어린이 독자에게 온전한 윤리를 가르치기 위해 현실과 유리된 윤리를 제시한다기보다는 어린이의 윤리가 그러하기에 아동문학의 윤리가 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석진에게서, 정민과 유림에게서, 조영에게서 그리고 어릴 적 나와 지금 내 주변의 어린이들에게서 그 윤리를 발견한다. 어린이들이 있기에 오늘의 윤리를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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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서강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아동문학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이와 문학’에서 동시를 추천받고,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2009)과 평론 부문(2012)을 수상했다. 연구, 창작, 평론 등 다양한 시선으로 아동문학을 탐색 중이다.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