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방문한 베이커리에서 중년의 사장님이 마감 시간이라며 이것저것 챙겨 주셨다. 값을 치르고 종이가방에 빵을 담으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분이 다정한 목소리로 “아가씨 짝은 왜 없냐”고 하셨다. 변화구였다. “그러게요. 왜일까요? 좋은 분 아시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나는 뚝 떨어지는 커브볼에 정신없이 헛스윙을 했다. ‘그런 질문은 무례하세요!’라고 받아쳐야 했는데…. 괜히 넉살 좋은 척을 하고 말았다. 이런 공격을 대비해 얼마나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가? 그러나 나는 만루에서 뱀 같은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바닥에 배트를 쾅쾅 내리치면서 생각했다. ‘너무 직구만 연습했나….’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씩씩대면서 거울을 봤다. 혹시 내가 짝이 없는 사람처럼 생겼나? 짝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지? 매직펌을 하지 않은 곱슬머리는 푸석해 보이고 화장을 하지 않아 점점 늘어나는 기미는 그날따라 유난히 선명했다. 언제부턴가 제멋대로 자라게 놔둔 눈썹, 흘러내리는 볼과 점점 자리를 잡는 팔자주름까지.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니 구석구석 전부 참 짝이 없어 보인다. 이런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오래 노력했는데. 슬럼프에 빠진 타자는 구경꾼의 야유 하나에 휘둘려 스스로의 자질을 의심한다. 안간힘을 쓰며 고쳤던 나쁜 습관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돌아오자 훈련도 연습도 전부 부질없게 느껴진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더 훈련에 매진해야 한다.
짝 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나? 다행히 한국엔 짝짓기 프로그램이 흥행 중이니 거기서 짝 짓는 데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나는 솔로>에서는 출연자의 연령을 제한한 ‘40대 솔로 특집’이 방송되고 있었다. 마흔에 가깝거나 마흔을 넘긴 출연자들이 제작진 앞에서 주눅 든 얼굴을 한 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많이 늦었다고 생각하지만’이란 말로 자신의 처지를 옹호한다. 그러자 심술궂은 누리꾼들이 그들의 자책을 약점 삼아 미혼의 40대가 대단한 흠인 것처럼 물어뜯기 시작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멋대로 폄하하고 성격에 하자가 있을 것이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짝 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나 살짝 보고 나오려 했던 나는 수많은 인간들의 악의에 질려 도망치듯 텔레비전을 끈다.
다시 거울을 본다. 40대의 내 모습이 서서히 보인다. 미간의 주름이 인상을 더 예민하게 만드는 것 같다. 갑갑한 마음에 주름을 지우듯 찬물로 세수를 하다가 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짝이 있음에 또는 40대가 아님에 안도하며 남의 인생에 말과 글을 얹는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서다. 능력주의가 만든 ‘정상적 인간’이라는 비정상적 기준은 학업, 직업, 결혼 등 인간의 모든 생애 주기를 감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구조적 문제마저 개인의 능력 문제로 치부하며 삶의 다양성을 부인하고 마침내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만든다. 나만의 기준을 갖추는 대신, 내 기준이 얼마나 절대적인 기준과 닮았는지에 집착하는 것이다.
“자라온 환경 때문에 실패할 자유를 모르는 것 같아요. 매 순간 ‘넌 증명해야 해’ 그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압박감을 느끼는 거죠.” 한화 이글스의 2021년 시즌을 다룬 다큐멘터리 <클럽하우스>에서 외국인 감독 카를로스 수베로가 이글스의 운영팀장에게 건넨 말이다. 어쩌면 야구는 절대적인 훈련량을 통해 원하는 성적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방인인 수베로 감독의 말은 당장의 팀 성적보다 팀 구성원들이 속해 있는 우리 사회를 향한 것처럼 보인다.
삶에서 만날 수많은 공격에 철저히 수비하듯 스펙을 쌓은 우리는 지금 이 인생이 야구가 아님을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스윙 훈련을 멈춘다. 살다가 갑자기 강속구가 날아온다면 이것은 받아쳐야 할 공이 아니다. 뭐라고 떠들어대든 그냥 신고할게요.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